[자료집]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최종 자료집 -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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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Let's get it!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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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최종 자료집

박선희 · 오경석


목차

자료집을 펴내며 : 우리 곁의 초국가적 영웅들 ……… 6 늘어나는 꿈의 목록(니로샨, 스리랑카) ……… 15 프롤로그 꿈의 반은 이루어지다 :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니로샨 준비된 한국행 : 그냥 먹고 살기는 하는데 다른 것은 못해요 예외는 없다 : 외국인 차별과 문화적 차이 돈 대신 리더십 : 10년 동안 한 직장을 다니고 있어요 바늘귀를 통과하다 : E-7 비자 변경에 성공 회사 밖에서도 필요한 사람 : 공동체 활동과 자율 방범 늘어나는 꿈의 목록 : 우리도 당신의 마음을 알아요 에필로그 내가 베트남의 태권도 부흥사(반흥, 베트남) ……… 28 프롤로그 나는 박린성의 태권도 관장 : 안산 국제 태권도 대회에 참가했어요 제게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에요 : 떼어놓을 수 없는 제 삶의 한 부분이죠 이주노동, 어렵지 않았어요 : 모든 게 다 좋았어요 축복이 실현되는 방법 : 제 한국 생활 잠깐 소개할께요 성공적인 귀환 : 전 돌아와서도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있어요 쉬운 일은 없어요 : 변화와 도전, 마다하지 않을 뿐이죠 계획과 꿈 :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한국사랑 에필로그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사하닷, 방글라데시) ……… 41 프롤로그 살기 편하지만 오기 힘든 나라 :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희망의 공간 한국 그러나 : 한국일은 어렵고 힘들다고 말해줘요 방글라데시와 한국문화는 70% 이상 다르다고 생각해요 : 조심해! 적응에서 통합으로 : 제도를 활용할 것 자유의 공간에서 :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아름다운 한국,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 한국의 봄, 가을은 정말 아름다워요 에필로그

멈추지 않는 에너지(시타람, 네팔) ……… 53 프롤로그 목적을 위한 삶1 : 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목적을 위한 삶2 : 저는 좀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어려움과 장애물들 : 너무 힘들었어요 어려움, 그 까짓 것 : 저는 강한 사람이에요 NEKO HAPPY DREAM : 제가 다 관리를 합니다 한국 다 좋아요 : 그래도 가족이 먼저죠 꿈은요 : 가족과 함께 한국과 함께, 네팔의 미래를 에필로그


김포를 누벼라, 나의 전성기는 이제부터(아리오나, 몽골) ……… 66 프롤로그 도대체 하는 일이 몇 개야? : 힘들죠. 그러나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녀의 사업 기술_ 먹는 공간을 관계의 공간으로 그녀의 상담 기술_ 문제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건 신뢰관계를 쌓는 거에요 그녀의 공부의 기술_ 쉽지 않지만, 포기란 없어요 자신의 일에서 긍지를 느끼려면_ 하던 대로 하지 않아요 제가 슈퍼 우먼이라구요? : 출발은 슈퍼 좌절이었어요 꿈과 계획 : 아이들이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 에필로그 평택의‘엉’반장 (엉묘진, 미얀마) ……… 80 프롤로그 시련과 어려움 : 오고 싶지 않았어요 시련의 연쇄 : 한국에 온 후 너무 고생 많았어요 어려움 속, 짧은 시간, 이룬 게 많으시네요. : 그냥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꾸준함은 용감함을 필요로 해요 : 맨 처음 왔을 때부터 한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돈이 전부는 아니죠 :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았어요 두 가지 성공을 위한 새로운 도전 : 미얀마 최고의 사회적 기업가를 향하여 에필로그


사랑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나는 로맨틱 실용주의자(여인, 중국) ……… 93 프롤로그 가깝다구요? 생각보다 멀어요! : 중국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거리 외국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 : 적응했지만 수용은 안 되는 내가 먼저 커밍아웃 : 저 중국 사람이에요! 나는 내 길을 간다. : 부모보다는 사랑을, 조국보다는 실용을 한국에서의 커리어 빌딩 : 실패는 전공에 적성을 추가할 자기 계발의 동기 전공을 살리니 휴머니즘은 덤 : 그녀의 엔지오 활동 심각하다, 그러나 회피하지 않는다. : 정체성에 대한 고민 꿈은 가까이 : 작은 것의 소중함과 자기 성찰 에필로그 에필로그 : 프로젝트 개요 ……… 105


자료집을 펴내며 우리 곁의 초국가적 영웅들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편만해 있는 이 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아보고자 하는 문제의식 으로 기획되었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 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통 해 우리가 만난 일곱 분의 이주민들은 가히 ‘영웅’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외적인 분들이셨다. 니로샨(스리랑카), 반흥(베트남), 사하닷(방글라데시), 시타람(네팔), 아 리오나(몽골), 엉묘진(미얀마), 여인(중국), 이 일곱 분이 경이롭고 감동적인 리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니로샨은 스리랑카 니오앙거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 고교 졸업 후 한국 인이 운영하는 직업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5년여 동안 음료회사에서 일하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2008년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공장에서도, 고 향에서도, 공장 밖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는 무려 10년째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 그는 ‘한국 사람 100명보다 나은’ 리더십 을 발휘한다. 고향에 남은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그는 든든한 후견인이다. 아직 1/2만 준공되었지만 그의 계획대로 고향에는 멋진 집이 지어졌다. 그 는 스리랑카 노동자 400명이 참가하는 공동체의 리더이기도 하다. 동료들 과 함께 그는 자율방범을 비롯 다양한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 앞장선다. 그 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비자변경에도 성공한 능력자이기도 하다. 입국 당시 비숙련 노동자(E-9)였던 그의 위상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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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E-7)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앞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스리랑카를 알리 는 ‘좋은 여행사’를 운영할 꿈에 부풀어 있다. 가족들에게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도 고심한다. 무엇보다도 딸 비누디가 자 유롭게 제 꿈을 실현시켜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한다. 꿈의 목록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니로샨은 행복한 사람이고 또 성공 한 사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족 중심적인 사람이요, 가족에 대 한 책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은 사 회에 대한 신뢰와 연대로 확장된다. 약간의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한 직장에만 근속한 그에게 사업주와 동료들은 최고의 찬사와 지지를 보낸다. 이주국 사회에서 쌓아올린 든든한 사회관계는 비자 전환에 성공하는 기반 이 된다. 그의 남다른 점은 자신의 성취들을 오롯이 사유화하는 대신 기꺼 이 동료노동자들과 나누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공유의 공간은 점점 넓어져 동료 노동자로부터 한국의 지역 사회, 그리고 한국과 스리랑카를 연결하는 초국가적 공간으로 까지 확장된다. 그 점에서 니로샨은 성공한 가장이요, 성공한 사회인이요, 성공한 초국가적 리더이다. 반흥은 베트남 박린성 출신의 귀환이주노동자이다. 그는 2005년부터 2013년 까지 한국의 안산과 화성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현재 그는 하 노이 인근에 소재한 한국계 기업의 인사 관리 담당자이자, 박린성 최대 규 모의 태권도장의 관장이기도 하다. 그는 이주노동자로서 뿐만 아니라 귀환 이주노동자로도 성공적인 삶을 구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첫 두달 을 빼고는 모든 게 선물과도 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돈을 벌었고, 태 권도와 한국어를 비롯해 컴퓨터, 자동차 정비 등 다양한 기술을 익힐 수 있 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었고, 근사한 집도 지 을 수 있었다.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그의 성공적인 삶은 이어지고 있다. 귀 환한 이주노동자들이 출신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재정착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다는 기존의 조사결과들과는 반대로 그의 영향력과 역량은 날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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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되고 성장하고 있다. 10여년 전 태권도에 입문한 그는 이제 자신의 제자 들을 이끌고 태권도 국제 대회에 참가한다. 중소제조업체의 단순 노동자였 던 그는 현재 종업원이 1천여 명에 달하는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이다. 한국 에서 그는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한다. 베트남에 돌아 간 후에도 그의 삶은 여 유와 자신감으로 넘쳐난다. 반흥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다.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마다하 지 않는다.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신의를 지킨다. 어 떤 상황에서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중요한 것은 베트 남과 한국,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사회 모두에서 반흥의 이와 같은 캐릭 터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 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도전적이었던 것 처럼 베트남에 귀환에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런 점에서 그의 성취는 그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존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 의 특별한 점은, 오롯이 개인의 역량으로 이루어낸 개인적인 성취들이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려고 한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청소년들에게 태권 도를 전수하여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 다. 이 점에서 반흥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 다. 그 ‘사회’가 베트남과 한국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글로벌 리더이기도 한 사람이다. 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브라만바리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 대학원에 서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인 그는 대학원 졸업 후 금융회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2008년 한국에 입국했다. 입국 초기 여느 이주노동자와 다름없 이 그 역시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이라는 혹독한 적응기를 경험해야만 했 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랐다. 한 번도 어렵다는 두 번의 비자변 경에 성공해 취업과 가족동반이 자유로운 ‘거주’ 이주민 자격(F-2)을 취득 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노동자였던 사하닷은 이제 사업가요, 사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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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하다. 그가 단순한 적응을 넘어 좀 더 큰 자유를 갈망했던 이유는 한 국을 단순한 이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친절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는 친절하고 아름답지만 고향의 문화와는 70퍼센트 이상이 다른 이 나라 에서,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이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덜 겪으며 꿈을 이 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업만큼이나 그들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동료들에게 그는 믿음직한 한국 생활의 길잡이요, 안내자 이다. 특히 그는 열렬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전파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사하닷은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기변 화에 개방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자기변화를 시도하려면 변화의 근거와 목 표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전제될 수 있어야 한다. 사하닷은 이 모두를 갖춘 사람이다. 엘리트 정치학도였던 그는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안타까운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주국 사회에서 역시 그의 냉철한 현실 인식은 빛을 발한다. 엄 청난 문화적 차이가 있었지만 그가 집중한 것은 제도의 활용이었다. 그의 전략과 노력은 성공하여 그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이라는 제도의 최선의 수혜 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한국은 적응의 공간을 넘어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재평가되었다. 그의 삶의 공간이 한국과 방글라데시, 방글라 데시와 한국으로 확장된 것이다. 확장된 삶의 공간에서 그의 도전은 계속된 다. 그는 자신의 자유와 선택지가 늘어난 삶의 노하우를 동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 시타람은 네팔 돌라카 출신의 귀환 이주노동자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09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2016년 귀환할 때 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네팔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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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이나 사업을 하기 전에는 획득하기 어려운 1억원이라는 거금을 벌 수 있었다.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10년 전에 한국어 초짜였던 그는 현재 누구보다도 유능한 한국어 강사이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는 숙련인력(E-7) 비자 취득에도 성공하였다. 목표지향적이되 친화적이 며, 순응적이되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누구보다 열렬한 친한주의자이며, 한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 현재 네팔에 설립된 ‘NEKO HAPPY DREAM’ 이라는 NGO의 책임자이자 한국어강사로 일하 고 있다. NEKO는 NEpal과 KOrea의 첫 두 음절을 결합한 사명이다. 네팔 로 돌아간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인프라가 전혀 없는 네팔에서 제조 업체를 경영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2층집을 짓는 것 이다. 시타람은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는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것을 실현 하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난관과 어려움은 그를 좌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게 만든다. 목표의 실현은 또 다른 목표의 설정으로 이어진다. 시타람이 이처럼 철저한 목표지향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된 동력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무다. 그리고 자기 계발을 위한 끊 임없는 노력이다. 주변의 (그가 비록 외국인, 곧 한국인일지라도) 올바른 충 고를 수용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다. 그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성취들을 업그레이드 시켜나갈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실들을 사회적으로 나누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의 목표가 설정되는 공간은 이제 한국과 네팔, 네팔과 한국 사이로 확장되었다. 개인적 부의 축적이라는 목 표는 네팔의 미래를 위한 제조업체 설립이라는 목표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아리오나는 울란바토르 출신의 몽골 여성이다. 2006년 고용허가제로 입 국, 안성의 순대국 공장 노동자로 출발한 그녀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소중 한 세 아이의 엄마요,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존중하고 믿어주는 한 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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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이며, 불경기를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는 식당과 노래방의 사장님이요, 지역 초등학교 시간제 한국어 및 몽골어 교사요, 이주민 지원 센터의 상담 활동가이며, 공동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2013년 방 송통신대에 입학한 늦깍이 법과대학생이기도 하다. 보통의 경우 한 가지만 제대로 해도 칭찬받아 마땅할 만한 이 많은 일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녀 는 대충 하는 적이 없다. 그 모든 일에서 예외없이 그녀는 혁신적이며 동시 에 헌신적이다. 그 어느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그녀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후회 역시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슈퍼우먼의 전형, 아리오나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출발은 슈퍼 능력이 아니라 슈퍼 좌절이었다. 몽골을 떠나기 직전 그녀의 인생은 만신창이 상처 투성이였다. 이모가 보내준 비행기표 한 장 달랑 들고, 상처뿐인 그녀가 찾아온, 이주민 에게 결코 관대하거나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는 후발이민국가 대한민국, 그 낯선 이국땅에서 모든 악조건을 보란 듯이 이겨내며 그녀는 당당하게 전성 기를 구가하고 있다. 아리오나가 슈퍼좌절을 딛고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이유를 몇 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 한국에서 성공하겠다 는 것 그리고 가족들(동생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의 남다른 점은 그녀가 설정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차별적이고 전략 적인 방법들을 택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 어떤 일(사업도, 상담도, 공동체 운영도, 아이들 지도)도 결코 ‘하던대로’ 하지 않는다. 선례가 없는 외로운 길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강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는다. 그녀의 또 다른 남다른 점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회피하기 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다 는 점이다. 법대 진학이 이에 해당한다. 그녀의 성공적인 삶의 결실들은 한 국뿐만 아니라 (몽골에 있는 동생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몽골 사회에도 공 유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녀가 목표로 한 많은 것들을 이뤄낼 수 있었 던 가장 큰 원동력은 가족(남편과 아이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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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묘진은 미얀마 양곤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 이제 서른 한 살의 젊은 청 년이다. 2014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대학 졸업 후 광 산에서 폭파전문가로 일하는 엘리트 직장인이었다. 평택의 ‘홍반장’이라 불 려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아주 바쁘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 는 자동차 부품 제조 및 도장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3년 전에 만들어 진 평택 미얀마 공동체의 설립자이자 대표이며,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을 위 한 불교 시설이자 쉼터인 담마야나 사원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주말에도 그 는 쉴 틈이 없다. 거리 청소 등 사회봉사, 한국어 가르치기, 통역 및 상담 활 동 등이 그의 일이다. 미얀마 쉬바다이에 설립한 어린이 도서관을 관리하 는 것도 그의 몫이다. 미얀마 양곤에 세운 그의 의상업체를 원격으로 경영하 는 것도 그의 일이다. 이제 그는 귀환을 앞두고 ‘사업’과 ‘공익’이라는 두 분 야에서의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성공을 꿈꾸고 있다. 그에게 한국은 올 마음 이 없었던 곳이다. 그의 한국 생활 초반부는 눈물흘릴만큼 고된 시련의 연속 이었다. 다중적인 악조건 속에서, 그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성과를 올리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과 꿈을 기획할 수 있었다. 엉묘진은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매우 특이한 사례다. 한국에 오는 것에 대한 동기화는 고사하고 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 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 덧붙여 가족과 동료들의 불신 등 그에게는 여 러 가지 악조건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짧지만 매우 성공적인 한국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몇 가지를 추론해볼 수 있다. 개방적인 마인드, 뛰어난 적응력, 한 회사에만 근속한 꾸준함과 성실함, 불의와 차별 에 대항하는 담대함과 용기, 한국어를 익히기 위한 노력, 동료들과의 친화 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남다른 점은 대체로 위축되기 마 련인 이주 공간에서 그가 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추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경제적 이익보다도 ‘의 미를 추구’하는 이주노동자였다. 그는 이주공간에서 어려움을 극복한 자신 의 노하우를 동료들과 나누기 위해 사비를 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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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그의 의미 추구의 공간은 미얀마로 옮겨진다. 미얀마 최고의 ‘사회적 기 업’을 향한 그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 여인은 북경 출신의 중국 여성이다. 2008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첫 발 을 딛었다. 그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의 듬직함에 반해 2010년 대 학원 유학생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2018년 현 재, 그녀는 한국의 웹툰 회사에서 웹편집자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자, 인 터넷 보안업체에 근무하는 남편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장점’이기만 한 결 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2년차 새내기 신부이기도 하다. 한국어 전공자로 서, 한국어에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으로서의’의 한국살이는 녹록치 않다. 때로는 생각과 문화의 차이는,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으로까지 깊어지기도 한다. 문화와 정체성의 혼란, 한국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 불 투명한 미래 등 여인이 경험하는 여러 문제들은 일반적인 결혼이주여성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 사회가 상상하는 결 혼이주여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의 어려움은 그녀의 도전을 막 지 못한다. 그녀의 동요와 고민은 그녀의 자신감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여인은 이주민 리더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출신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책무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녀는 객관적이고, 실용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녀는 출신국과 이주국의 장 단점을 매우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녀의 이주 동기는 자신의 ‘전공’을 보 다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선택의 주 체는 언제나 자신이다. 곧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다. 이런 점에서 여인은 ‘신 세대’ 이주민 리더일 수 있다. 외국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에 대응하는 그녀의 자세 역시 남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외국인임을 먼저 밝힘으로써 관 행적인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차별을 선제적으로 방어한다. 신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전형적인 이주민 리더들과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 좌절을 새로운 도전과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는다. 자신의 재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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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우를 동료 이주민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고자 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 민 속에서도 그녀의 삶을 성공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행복하고 즐 겁게 해주는 최고의 동력은, 가족(한국인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이 다. 이 일곱분의 ‘영웅’들을 만나고, 이들과 우리가 함께 경기도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소속감, 긍지와 책무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한 지난 1년은 우리 연구진에게도 매우 행복하고 소중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기꺼이 시간을 내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어준 일곱분께 다시 한 번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이 자료집의 이야 기들이,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상대화하고, 그분들의 목표지 향적이며 이타적인 삶을 위한 열정을, 우리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계 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 2018. 12. 오경석·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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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꿈의 목록 (니로샨, 이주노동자, 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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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니로샨은 스리랑카 니오앙거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 고교 졸업 후 한국 인이 운영하는 직업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5년여 음료회사에서 일하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2008년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공장에서도, 고향에서 도, 공장 밖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는 무려 10년째 한 직장에 서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 그는 ‘한국 사람보다 100명보다 나은’ 리더십을 발휘한다. 고향에 남은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그는 든든한 후견인이다. 아직 1/2만 준공되었지만 그의 계획대로 고향에는 멋진 집이 지어졌다. 그는 스 리랑카 노동자 400명이 참가하는 공동체의 리더이기도 하다. 동료들과 함 께 그는 자율방범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 앞장선다. 그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비자변경에도 성공한 능력 자이기도 하다. 입국 당시 비숙련 노동자(E-9)였던 그의 위상은 전문 인력 (E-7)으로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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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스리랑카를 알리는 ‘좋은 여행사’를 운영할 꿈에 부풀어 있다. 가족들에게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도 고심한다. 무엇보다도 딸 비누디가 자유롭게 제 꿈을 실현시켜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한다.

꿈의 반은 이루어지다 :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니로샨 한국의 외국인력 제도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운용된다. 고용허가제는 저 숙련 노동의 단기순환을 원칙으로 하는 ‘방문노동자(guest worker)’ 제도 이다. 고용허가제 대상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가족동반과 장기 체류가 원 천적으로 불허된다. 2008년 한국에 입국한 니로샨은 고용허가제 대상 이주노동자였다. 그런데 현재 니로샨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몇 년 만 더 지나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된다. 1년 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비자변 경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비자변경을 통해 니라샨의 위상은 ‘미숙련 노동자’ 에서 ‘숙련인력’으로 격상되었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지금 상황이 그 에게는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가족들이랑 같이 사는 게 좋아요. 저희가 원하는 게 같이 사는 거였잖아 요. 왜냐면 우린 오랫동안 떨어져있었잖아요. 그래서 같이만 있으면 어려운 게 없어요.” 그는 2008년 입국 이래, 그리고 저숙련노동자(E-9)에서 숙련인력(E-7) 으로 위상이 변화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 곳의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직 장에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못할 정도이 다. 한국인 공장장은 그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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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로샨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에요. 여러 방면에서 니로샨 의 역할이 커요. 모든 작업의 오더는 니로샨을 통해서 다 나가요. 우리 회사의 시스템 상으로, 니로샨은 한국 사람보다 백배는 나아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니로샨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아버지 가 일찍 돌아가신 가정의 3형제의 장남으로서 니로샨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장모님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없어서 제가 남동생들을 많이 도와줬어요. 동생들은 스리랑카 에서 직장 다니며 잘살고 있어요. 장모님께도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드려요. 저희 엄마한테도 보내드리구요.” 니로샨이 한국에 오기 전에 갖고 있던 꿈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근사한 집을 짓는 것이었다. 그의 꿈은 반 정도는 이루어진 상태다. 1층은

아내와 딸(비누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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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했지만 2층은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오기 전 꿈은 집 짓는 거예요. 그땐 그게 다였어요. 그런데 아직 다 못했어요. 2층은 아직 못 지었어요.”

준비된 한국행 : 그냥 먹고 살기는 하는데 다른 것은 못해요. 니로샨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28세 때이다. 젊은이들에게 꿈꿀 자 유를 허용하지 않는 스리랑카의 불투명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국인 들이 운영하는 직업전문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스리랑카의 가장 큰 문제는 그냥 “먹고 살기는 하는데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다. 발전의 가능성 없이 하루하루를 반복하는 일 이외에는 뚜렷이 할 수 있 는 일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상황이 변화될 가능성 역 시 희박하다는 것이다. 니로샨은 고교 졸업 후 한국인이 지원하는 직업전문 학교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한국어를 익혔고 1년 반 만에 읽고 쓰기를 독 파할 수 있었다. “제가 다닌 기술전문학교는 한국에서 도와주는 직업전문학교에요. 선생 님들도 한국선생님들 있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인가 한국말 가르쳐줬어요. 일년 반 동안 거기서 한국말 배웠어요, 글쓰기하고 쓰는 거하고 읽는 거 그 런 거는 한국 오기 전에 이미 다 할 수 있었어요.” 기술학교를 수료하고 니로샨은 스리랑카 상황에서는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음료수 회사에 취직했다. 그 회사에서 5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러 나 급여는 부를 축적하거나 삶의 수준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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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했던 곳은 우리나라에 있는 큰 회사인데요, 콜라, 펩시콜라 그런 거 만드는 회사였어요. 거기서 5년 동안 일했어요. 거기 월급으로는 먹고 살기는 하는데 다른 것을 하기는 어려웠어요. 집을 짓는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집을 짓는 게 꿈’이던 니로샨은 그래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준비된 니로샨은 단 한 번에 고용허가제 선발 시험에 합격한다.

예외는 없다 : 외국인 차별과 문화적 차이 아직 반일 뿐 이지만, 꿈의 반일 망정 그냥 이루진 것은 아니다. 외국인 차 별과 한국 사회의 배타적인 문화적 관행으로부터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에서는, 니로샨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우선 사업장에서의 차별이다. 회사의 운영에 절대적이라 할 만큼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니로샨의 급여는 10년째 동일하다. “제가 없으면 회사 진짜 힘든데, 사장님도 그거 다 알고 있는데, 그만큼 회사는 저한테 안 해줘요. 항상 돈이 없대요. 10년 동안 계속 돈이 없다고. (다른 데 가면 받을 수 있는 돈의 절반 정도를 받고 있어요.)” 외국인들 때문에 회사가 돌아가고, 위험한 일은 외국인들이 도맡아서 하는 데도, 회사는 기본적인 안전장구 조차 제 때에 제공해주지 않았다. “우리 회사에서는 작업복이나 안전화 그런 거 안줘요. 사장님에게 ‘왜 외 국인에게 이렇게 (차별)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이유 없이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한국인 관리자는 니로샨의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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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어김없이 존재한다. “예전에 한국 과장님이 우리랑 일 때문에 항상 말다툼을 했어요. 일을 잘 못하지 않아도 계속 잘못한다고 꼬투리를 잡았어요.”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이다. 한국에도 불교 신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도 한국인들은 스리랑카 사원 건설에 반대한다. 심지어 스리랑카 스님이 한 국어와 한국 문화에 능통한 한국통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의 반대는 완고하다. 스리랑카 불교를 마치 과격한 테러리즘처럼 기피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돈 대신 리더십 : 10년 동안 한 직장을 다니고 있어요. 니로샨은 10년 째 한 직장에서 일한다. 파주에 있는 전자제품 부속 제작 업체가 그의 직장이다. 회사에서 니로샨은 ‘작업반장’이다. 회사의 시스템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니로샨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진행이 되 지 않는다. 회사는 ‘한국사람 백 명 보다’ 월등한 그의 리더십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회사가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유는 스리랑카 노동자들 이 많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회사 직원 12명이 모두 스리랑카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없어요.” 사장은 니로샨의 리더십을 믿고 스리랑카 직원들의 관리를 전적으로 위 임했다. 정확한 작업 지시는 물론이요, 생활 상담과 통역 까지 도맡아 해주 는, ‘직속상관’ 니로샨을, 스리랑카 노동자들도 모두 믿고 따른다. 기여도에 비해서는 처우가 열악했지만, 그래도 니로샨은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 오히 려 점점 일이 줄어들고 때때로 월급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진 회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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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함께 걱정하는 ‘가족과도 같은’ 관계가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함 께 일한다는 것만도 ‘감사’한 관계, 그것이 니로샨과 회사의 관계다. “그래도 다른 회사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월급이 안 나왔던 적도 있 어요. 회사가 되게 어렵고, 일이 없어서 그런 상태니까 그냥 이해해야죠. 사 장님 월급 안주는 것 그런 건 없어요. 어려울 때 좀 늦게 준 적이 있는 거죠. 지금 감사한 맘으로 계속 일하고 있어요. 일 편해요. 일 오래됐으니까 잘 알 잖아요.”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파트너십을 선택한 니로샨에게, 회사는 리더 의 지위와 더불어 비경제적인 보상들로 화답한다. 회사에서 니로샨을 불편 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장님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회사에서는 저한테 잔소리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제 말 다 잘 듣 고, 사장님도 잘 들어요.”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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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센터와의 소통의 문제로 성실근로자로 재입국할 기회를 놓칠 뻔 했 을 때 여러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니로샨의 ‘성실한 근속’을 입증해 준 사 람은 다름 아닌 사장님이었다. E-7 비자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도 사장님의 지원과 지지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E-7비자로 바꾸는데 되게 어려웠어요. 2,3년 동안 준비했었어요. 회사 에서도 필요한 서류들이 많았어요.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바늘귀를 통과하다 : E-7 비자 변경에 성공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특정 활동’ 혹은 ‘숙련인력’ 비 자(E-7)의 취득은, 마치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엄청난 행운을 뜻한다. 비숙련비자(E-9)를 가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E-7 비자 소지자들 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 갱신을 하는 경우 제한 없이 한국에 체류(하거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한국에서 생활하 는 수십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 이 제도의 혜택을 보는 이들은 매년 몇 백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니로샨은 그 어려운 비자변경에 성공한 능 력자이자 행운아이다. “숙련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서 혼자 공부했어요. 파주에 스리랑카 사람 중에 취득한 사람은 아직 저밖에 없어요.”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한 것과 더불어 니로샨이 비자변경에 성공할 수 있 었던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바로 지인들의 전폭적인 도움이었 다. “**센터의 이 선생님에게 도움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우리 회사에 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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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있어요. 경리누나도 많이 도와주었어요. 사장님 당연히 오케이 해주셨 구요. 서류에 사인해주고 출입국에도 몇 번 왔다 갔다 해서 많이 도와줬어 요.” 2년 전에 비자변경에 성공한 니로샨은 이제 자신의 노하우를 동료들에게 전수해주고자 한다. ‘바꾸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비자를 바 꾸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은 일이다. 비자변경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 니로샨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리 고 기능적으로 조직(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 친구 중에 비숙련(E-9)에서 거주(F-2)로 비자 전환에 성공한 친구가 있어요.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 그 친구 사장님이 너무 많이 도와 줬어요. 그 친구 기술이 좋아요. 기술이 좋아서 (그 회사에) 꼭 있어야 되는 사람이에요.”

회사 밖에서도 필요한 사람 : 공동체 활동과 자율 방범 니로샨은 파주 지역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이기도 하다. 공동체 대표로서 그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한다. “파주 지역에 4백 명 가량 스리랑카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공동체 대표 에요. 주로 하는 행사는 축제, 설날 행사, 노동교육, 요양원 방문 봉사 등이 에요. 어르신들 요양원에 방문해서 주로 청소 등 자원봉사를 하는 거예요.” 공식적인 행사보다 더욱 중요한 공동체의 기능은 ‘모임’ 그 자체이다. 큰 행사가 아닌 일상적인 모임에는 50여명 정도의 스리랑카노동자들이 모인 다. 그들과 함께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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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셈이다. 이따금 스리랑카 스님을 모셔 이주 공간에서 피폐해진 마음의 양식을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는 것도 공동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공동체 멤버들은 휴일이 나 여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친구이기도 하다. 휴일에는 주로 스리랑카 국 기라고 할 수 있는 크리켓 경기를 한다. 파주에만 10개 팀 정도가 만들어져 있어 언제든지 경기를 즐길 수 있다. 자율 방범 역시 주요한 공동체 활동 가 운데 한 가지이다. 니로샨과 스리랑카 공동체는 파주 경찰서에서 주관하는 외국인자율방범대의 일원이기도 하다. 한‘달에 한번씩 범죄 예방 차원에서 외국인 밀집 지역을 순찰하는 것이다.

늘어나는 꿈의 목록 : 우리도 당신의 마음을 알아요. 한국 오기 전에 니로샨의 꿈은 멋진 집을 짓는 것이었다. 2층 가운에 1층 을 완성했으므로 그 꿈의 반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제 꿈의 반만 남

스리랑카 공동체 체육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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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것일까. 아니다. 한국 생활 10년을 통해 니로샨의 꿈의 목록이 다시 늘어 났기 때문이다. 그를 가장 설레게 하는 새로운 꿈은 여행사를 운영하는 것 이다. ‘좋은 여행사’를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스리랑카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2017년 니로샨은 한국인으로 팀을 꾸려, 스리랑카 여행을 기 획하고, 현지 가이드 역할을 수행했던 적이 있다.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 다. “우리나라 유명한 곳을 설명해 주는 게 행복했어요. 지금 꿈은 앞으로 (현 재 짓고 있는 집을) 이쁘게 만들어서 한국 사람들 게스트 하우스처럼 사용 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에게 스리랑카를 알리고 싶어요.” 여행사 운영 이외에도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많다. 딸 비누디가 ‘자신이 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가) 저보다 잘 살아야 되요.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했으면 좋겠 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저는 그런 거 없어요. 얘가 원하고 싶은 것 해야 되 잖아요.” 아내가 원하는 좀 더 깨끗하고 안전한 집으로 이사도 갈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못 가본 제주도 여행도 조만간 다녀와야 한다. “스리랑카와 한국을 왔 다 갔다”하면서도 더 이상 가족과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방법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족과 함 께 사는 것, 그리고 가족들이 원하는 안전하고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은 어쩌면 니로샨만의 꿈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꿈꾸는 희망 사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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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기획한 스리랑카여행 홍보 포스터

에필로그… 꿈의 목록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니로샨은 행복한 사람이고 또 성공 한 사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족 중심적인 사람이요, 가족에 대 한 책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은 사 회에 대한 신뢰와 연대로 확장된다. 약간의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고 한 직장에만 근속한 그에게 사업주와 동료들은 최고의 찬사와 지지를 보낸다. 이주국 사회에서 쌓아올린 든든한 사회관계는 비자 전환에 성공하는 기반 이 된다. 그의 남다른 점은 자신의 성취들을 오롯이 사유화하는 대신 기꺼 이 동료노동자들과 나누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공유의 공간은 점점 넓어져 동료 노동자로부터 한국의 지역 사회, 그리고 한국과 스리랑카를 연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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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가적 공간으로 까지 확장된다.

내가 베트남의 태권도 부흥사 (반흥, 귀환 이주 노동자,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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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반흥은 베트남 박린성 출신의 귀환이주노동자이다. 그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의 안산과 화성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현재 그는 하 노이 인근에 소재한 한국계 기업의 인사 관리 담당자이자, 박린성 최대 규 모 태권도장의 관장이기도 하다. 그는 이주노동자로서 뿐만 아니라 귀환이 주노동자로도 성공적인 삶을 구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첫 두 달을 빼고는 모든 게 선물과도 같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돈을 벌었고, 태권 도와 한국어를 비롯해 컴퓨터, 자동차 정비 등 다양한 기술을 익힐 수 있었 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었고, 근사한 집도 지을 수 있었다.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그의 성공적인 삶은 이어지고 있다. 귀환 한 이주노동자들이 출신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재정착할 수 있는 확률이 매 우 낮다는 기존의 조사결과들과는 반대로 그의 영향력과 역량은 날로 확대 되고 성장하고 있다. 10여 년 전 태권도에 입문한 그는 이제 자신의 제자들 을 이끌고 태권도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중소제조업체의 단순 노동자였던 그는 현재 종업원이 1천여 명에 달하는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이다. 한국에 서 그는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한다. 베트남에 돌아 간 후에도 그의 삶은 여유 와 자신감으로 넘쳐난다. 그의 이주노동 및 귀환의 경험을 이토록 예외적일 정도로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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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린성의 태권도 관장 : 안산 국제 태권도 대회에 참가했어요. 2000년대 반흥이 한국을 찾았을 때, 그는 이주노동자였다. 2018년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그는 ‘안산 국제 태권도 대회’에 제자들과 함께 참 가한, 베트남의 태권도 관장이었다. 한국이 그에게 준 여러 가지 선물 중에 서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 없이 태권도를 선택한다. 반흥의 태권 도 도장은 하노이 인근의 박린성에 소재한다. 반흥의 도장은 박린성 전체 4 곳에 불과한 태권도장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그가 운영하는 두 개의 도장에서 수련하는 학생들은 100여명에 이른다. 제자들은 7살부터 고등학 생 까지 다양하다. 반흥은 그들에게 태권도뿐만 아니라 미래의 희망과 꿈 도 전수중이다. 반흥의 영향을 받아 제자들 중에는 한국으로 태권도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다. 나중에 반흥과 같은 태권도 사범이 되고 싶 어 하는 아이들도 있다. 반흥은 수강료를 거의 받지 않는다. 사정이 어려운 1/3 가량의 수련생들에게는 아예 한푼도 받지 않는다. “저는 한국에서 몇 년 동안 태권도를 무료로 배웠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 게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저도 어려운 친구들에게 무료로 태권도를 가르쳐 주어야 겠다고요. 아이들을 모아가지고 1년 동안 무료로 했어요. 지금도 많 이는 안 받고요.” 반흥에게 태권도를 배운 아이들은 ‘안산 국제 태권도 대회’ 품새 부분에 서 금메달 4개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반흥의 제자 가운에 한 아이가 오토바이로 납치되던 중 범인을 치고 뛰어내려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도 있 었다. 이 사건을 통해 태권도는 아이들의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스포 츠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반흥은 태권도가 진짜 아이들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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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1회 안산컵 국제친선 태권도 대회 참가

제게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에요 :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제 삶의 한 부분이죠. 현재 반흥은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하노이 인근 소재 한국 기업의 인사담 당자이다. 회사는 현재 폐업 절차가 진행 중이다. 폐업이 완료되면 그 역시 이직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는 아직 고민 중이다. “이제 회사를 그만둘 건지, 태권도에만 집중할 건지도 아직까지 결정을 못했어요.” 그에게 태권도는 결코 직장 생활을 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부업’ 정도가 아니다. 직장 생활의 지속성 자체를 고민하게 할 정도로, 그의 인생 자체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반흥에게 태권도는 직 장 선택의 기준이기도 하다. 퇴근 후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으 려면, 퇴근 시간이 빨라야 한다. 그리고 태권도장과 회사의 거리가 가능한 한 가까워야 한다.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처우를 해준다고 해도, 그의 회사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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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 생각하고 있는데 회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가 정해지는 것 보고 이사를 갈 수도 있어요. 사무실에서 5시에 퇴근해야 태권 도장을 유지할 수 있어요. (지금 이 회사는) 태권도장 수업 얘기도 했는데, 급한 일 아니면 집에 가져가서 일해도 된다(도장 개장 시간에 맞춰 퇴근해 도 된다)고 해서 일하게 됐어요.” 그가 태권도에 입문한 것은 한국에 입국한 후 6개월 후였다. 같은 공장에 서 일하던 필리핀 동료의 소개로 지방 정부가 제공하던 무료 태권도 프로그 램에 참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7년간, 그는 퇴근 후 저녁 시간, 일주일에 3일씩, 수련에 정진했고, 결국 국기원의 공인 2단을 획득하 기에 이르렀다. 태권도에 대한 사랑과 집념은 한국에서의 8년간의 이주노 동자 생활을 넉넉하고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기도 하였다. “태권도 수업에 가면 친구도 만나고, 발차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다 풀리 죠.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7년간) 계속 운동을 했어요.” 좋아하던 운동이었던 태권도는 이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그의 인생의 소중한 일부분이자 미래가 되었다. 그는 태권도가 자신을 변화시켰듯이, 베 트남의 아이들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매일 저녁 그의 발차기는 계속된다. “베트남에서 아이들이 태권도를 잘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태권도장 을 더 키우고 싶구요. 태권도 사범이 되고 싶은 제자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 이 크면 같이 크게 도장을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주노동, 어렵지 않았어요. : 모든 게 다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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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제자들과 함께

이주노동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어렵다’ 혹은 ‘힘들다’에 가깝다. 대부분 의 이주노동자들은 유입국 사회에서 ‘이주민이요, 노동자요, 외국인’이라는 삼중의 차별과 불이익을 경험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흥은 예외 적이다. 이주노동자로서 경험한 그의 8년간의 한국살이는 믿을 수 없을 만 큼 ‘아무 문제가 없다.’ “한국에서 안 좋은 일은 없었어요. 한국 사람들로부터 도움도 많이 받았 구요. 한국 사람들의 단점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같이 일했던 사장님들도 그렇고, 저는 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무엇이 그의 이주노동 경험을 이처럼 일반적인 관념을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예외적인 것으로 만든 것일까? 그가 남들보다 치밀하거나 체계적으 로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준비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군에 입대했고, 군제대 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심정으로, 우연히 신청 서를 접수했는데, 바로 선정이 되어 두어달 만에 한국에 입국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향수병과 언어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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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기후의 차이, 문화의 차이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러한 혼란과 좌절의 시기는 한국에 입국한 초기 ‘두 달’에 불과했다. “한국에 와서 가장 기뻤던 때도, 슬펐던 때도 첫 두 달 이었던 것 같아요.” 두 달 간의 막막함은 첫 월급을 받으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100만 원의 첫 월급을 받고, 거금인 1천 달러를 고향에 송금하고도 돈이 남은 그 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이후 그 의 한국 생활은 ‘축복’의 연속과도 같았다. 그가 송금한 돈으로 현재 부모님 과 함께 살고 있는 멋진 집이 지어졌다. 2009년에는 아름답고 유능한 고등 학교 동창과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여덟 살인 큰 아들은 벌써 “태권도를 하고 있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해”, 태권도가 전부인 아빠를 기쁘게 해주고 있다. 한국 생활은 돈과, 집, 태권도, 사랑과 가족이외에도 그에게 많은 것들을 선 물해주었다. 그는 한국어 토픽 3급을 획득했고, 자동차 정비술을 익혔으며, 컴퓨터 프로그램에 참가해 워드나 액셀 등 사무용 프로그램 사용법도 익힐 수 있었다.

축복이 실현되는 방법 : 제 한국 생활 잠깐 소개할께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이 술술 풀릴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 무나 쉬워 보이는 그의 한국 생활,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 면, 어느 순간 수긍이 간다. 아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축복이 그 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 그가 반흥이다. 일단 반흥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친화적이다. 첫 직장인 안산의 동파이프 공장에는 이미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다른 외국인들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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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태권도 어울림 한마당 참석

화성의 식품회사였는데, 그는 그 곳의 분위기를 ‘한 가족 같다’고 표현한다. “화성에 있는 식품 회사는 직원들이 거의 가족, 친족이었어요. 한 가족 같 아서 제가 그래서 일하기로 했어요.” 친화적이지만 그는 치밀하고 담대하기도 하다. 한국에 온 지 불과 일주일 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동료가 회사에서 무려 7킬로미터가 떨 어진 피씨방에 반흥을 택시로 데려다 준 적이 있다. 다음 주부터 반흥은 방글 라데시 친구의 도움도, 택시 기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그 피씨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택시가 가는 경로를 일일이 노트로 기록한 후, 그 노트를 보고 걸 어서 피씨방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택시가 어느 경로로 가는지 노트로 일일이 다 적었어요. 그 다음 주부터 일요일마다 노트를 보고 약 한 시간 반을 걸어서 그 피씨방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채팅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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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함과 성실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자산이자 매력이다. 그가 태권도는 물론이요, 한국어, 컴퓨터, 자동차 정비 등 각종의 기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친구들이 놀러’ 다니는 일과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을 온전 히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 놀러 다닐 때 열심히 한국어 공부해서 토픽 3급도 취득했어 요. 일 없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저녁에는 스 스로 공부해야 했어요.”

성공적인 귀환 : 전 돌아와서도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들이 출신국으로 귀환해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확률 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된다. 목적국에 적응하는 것만큼이나 몇 년 혹은 십여년 이상 떠나있던 출신국에 다시 적응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 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재결합하는 문제며, 재취업하는 문제 등이 결코 쉽 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 번 이주를 경험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적 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이주를 선택하게 된다고들 한다. 이 점에서도 반흥 은 예외다. 그의 귀환은 성공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모범사례로 평가하기 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출퇴근을 한다. 맞벌이를 하지 만 육아 걱정도 없다. 부모님께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쪽같은 세 자녀를 키워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재취업 과정도 순조롭다. 베트남으 로 돌아온 직후, 그 역시 진로를 고민해야만 했다. 사업을 해야 할까, 취업 을 해야 할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업을 선택한 귀환 이주노동 자들 대부분이 고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사업하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지만 다른 귀환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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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쉽지 않는 것 같아 포기하고 회사부터 먼저 다니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직장은 하노이 인근 박린성에 소재한 한국계 기업, 핸드폰 충전 케이블 제작 회사였다. 회사의 규모는 그가 한국에서 일했던 곳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직원이 무려 95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도 달라졌다. 한국에서 그는 단순 노동자였다. 베트남의 회사에서 그는 직원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인사관리 담당자이다.

쉬운 일은 없어요. : 변화와 도전, 마다하지 않을 뿐이죠. 베트남의 한국 기업에서, 베트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인사 및 노무 관 리’ 담당자로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흥 이전에 이 일을 담당했던 서너명의 직원은 “고된 노동과 통역의 부담”이라는 공통의 사유 로 사직을 선택했을 정도이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이 편 안한 언어로, 업무를 지시하고 관리하는 일은 언뜻 보면 매우 쉬워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관리자와 베트남 직원들 사 이의 상이한 입장과 견해를 중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측을 향해서는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에 게는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중재는 결코 쉬울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정당한 일처리를 하고 있을 때조차, 일부 노동자 들은 협박 문자를 보내오기도 한다. “회사 폐업이 결정된 후 구조조정을 할 때 직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어요. 어제도 협박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러나 그는 담담하다. 같은 민족 노동자들로부터 오해와 협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자신의 선택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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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롱베이에서 가족과 함께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제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옹호하게 되니까 노동자 들은 제가 한국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서운하기도 했지만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는 동료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폐 업 절차를 밟고 있는 미래가 없는 회사이지만 “대표님과 청산 작업이 마무 리 될 때 까지 남아있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생산직’에 종사할 때 배운 워드를 ‘사무직’ 모드로 전환하는 일 역시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8년여 삶을 경험한 그에게 ‘생활 및 생산’ 관련 한국어에는 능 숙하다. 한국에서 토픽 3급도 획득하였다. 그렇지만 ‘사무직’으로서 그에게 한국어는 다시금 미지와 무지의 영역에 해당된다. 사무 관련 용어들 대부분 은 ‘번역’이 필요할 정도로, 그에게도 낯선 언어들이다. 새로운 과제를 다루 는 그의 방법은 한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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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 반드시 “기록한 후, 집에 가서 사전으로 찾 아보고 공부” 하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계획과 꿈 :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한국사랑 현재 직장이 폐업된 후 재취업에 대해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넘쳐 나는 추천과 스카웃 제의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취업도 어렵지 않아요. 법인장님이 현재 회사 폐업되면 일하라 고 회사도 소개시켜주었고 근로조건도 더 좋은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거절 했어요. 아내 회사 사장님이 스카웃 제의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내랑 같은 회사 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절했어요.” 그가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다음 번 직장은 퇴직한 상사가 설립한 ‘기업 용 발전기 원자재 수입 제조업체’에서 ‘총괄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다. “그 상사가 한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해서 발전기 회사에 공급하는 업체를 만들 계획인데 총괄매니저로 일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그 분 이 영업 및 투자계약을 하면 제가 부품조달 등을 총괄하는 거죠. 지금 회사 마무리 되는대로 10월 중부터 시작할 계획이에요.” 귀환이주노동자로서 성공 가도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 국을 떠난 지가 5년여가 이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그의 그리 움,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그의 동경은 결코 작아지지 않고 있다. “집안 형편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한국에 유학 오고 싶었어요. 다시 예전으 로 돌아가서 한국에서 생활한다면, 한국어도 더 열심히 배우고 가족들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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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서 한국에서 같이 살고 싶어요. 가족을 초청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부럽기만 해요. 물론 제가 일하던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족 초청이 가능한) 비자를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요.”

에필로그… 반흥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다.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마다하 지 않는다.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신의를 지킨다. 어 떤 상황에서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중요한 것은 베트 남과 한국,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사회 모두에서 반흥의 이와 같은 캐릭 터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 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도전적이었던 것 처럼 베트남에 귀환에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런 점에서 그의 성취는 그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존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 의 특별한 점은, 오롯이 개인의 역량으로 이루어낸 개인적인 성취들이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려고 한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청소년들에게 태권 도를 전수하여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 다. 이 점에서 반흥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 다. 그 ‘사회’가 베트남과 한국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글로벌 리더이기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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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사하닷, 이주 노동자, 방글라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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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브라만바리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 대학원에 서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인 그는 대학원 졸업 후 금융회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2008년 한국에 입국했다. 입국 초기 여느 이주노동자와 다름없 이 그 역시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이라는 혹독한 적응기를 경험해야만 했 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랐다. 한 번도 어렵다는 두 번의 비자변 경에 성공해 취업과 가족동반이 자유로운 ‘거주’ 이주민 자격(F-2)을 취득 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노동자였던 사하닷은 이제 사업가요, 사회활동가 이기도 하다. 그가 단순한 적응을 넘어 좀 더 큰 자유를 갈망했던 이유는 한 국을 단순한 이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친절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는 친절하고 아름답지만 고향의 문화와는 70퍼센트 이상이 다른 이 나라 에서,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이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덜 겪으며 꿈을 이 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업만큼이나 그들을 돕는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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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벗고 나선다. 동료들에게 그는 믿음직한 한국 생활의 길잡이요, 안내자 이다. 특히 그는 열렬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전파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살기 편하지만 오기 힘든 나라 :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사하닷은 2008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그는 대학 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방글라데시의 엘리트이다. 졸업 후 1년여 금융회 사에 근무했던 그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간명하다. 방글라데시의 상황이 젊은 엘리트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의 70~80년대 정치상황 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일자리도 없고, 취업을 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지 요.” 한국에서 지낸 지난 10여년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0년 잠깐 귀국하여 취업 준비 기간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필해주었던 아내와 결혼하 였다. 2014년 말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꿈꾸는 비자 변경, 그것도 두 번이 나 연속으로 성공하였다. 그 결과 그의 위상은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E-9) 에서 ‘전문인력’(E-7)으로, 전문 인력에서 취업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부여 받는 ‘거주민’의 지위(F-2)로 격상되었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직업을 바꿀 수 있다. 고용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가족을 초청해서 함께 살 수도 있다. 그는 그러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 다. 얼마 전까지 하던 사업을 잠시 접고 현재는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조만간 가족들과 재결합할 것이고, 그 때에는 다시 사업에 전념할 계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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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에게 한국은 이제 이처럼 ‘살기 편한 곳’이고 ‘사람들도 다 친절’한 곳이 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현재의 자유와 편안함은 그 어려움을 극 복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을 이미 끝낸 사하닷이기에 누릴 수 있는 보상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그렇지만 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방 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한다. 그들의 한 국 생활 도우미요,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싶어한다.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방글라데시 사람이 많은데, 과거보다 더 어려워 졌어요. 제가 올 때보다 10배 가량이나 어려워졌어요. 돈이 많고, 공부를 많 이 해도 한국에 입국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어렵게 한국을 선 택한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희망의 공간 한국 그러나 : 한국일은 어렵고 힘들다고 말해줘요. 다른 나라로 이주를 선택한 방글라데시 사람들 조차 희망할 정도로 한국 은 인기있는 이주의 목적국이다. 그러나 ‘희망의 공간’은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한국 적응은 끝났다.” 라고 사하닷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지난 10여년의 한국 생 활 동안 그만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하고 그를 극복 혹은 관리할 수 있 는 기술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로서 사하닷은 가스밸브 제조회사, 고무공장, 스폰지 제조공장, 농 기구제조업체 등에서 일한 바 있다. 그 곳에서 그가 경험한 ‘어렵고 힘든’ 일 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 째 사업장의 고용주는 계약과는 다르게 그에게 지사 근무를 강요했다. 혹독한 노동 조건과 노동 강도는 대부분의 사업장에 서 공통적이었다. 고무 공장의 유독가스는 견디기 어려웠다. 농기구제조업체 의 페인트 작업은 특수마스크를 착용하고도 한 시간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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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나 안전 장구는 사비로 구매해야만 한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혹독한 조 건에서, 하루 열네시간에 가까운 고강도 노동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예외 없이 처우와 승진에서의 차별과 불이익을 경험해야만 한다. 사하닷 의 경우 퇴직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업주를 노동부에 진정해서, 일부를 받아냈 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승진에서의 차별은 그에게도 여전히 ‘넘사벽’의 장애 물이다. “5년 이상 일을 잘 했는데요, 한국사람 및 다른 외국인과의 차별이 있어 서 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인과 중국인의 경우는 2년만 지나 도 반장이나 과장으로 승진을 시켜주었는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동료들에게 ‘희망의 공간’의 현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어요.”

방글라데시와 한국문화는 70% 이상 다르다고 생각해요. : 조심해! 사하닷이 평가하기에, 한국 문화와 방글라데시 문화 사이에는 공통점보 다 차이점이 훨씬 크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가 결정적인 어려움이 되지 않 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 그것은 ‘조심’이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동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그가 맨 처음 하는 말은 “조심해!”이다. 가장 많 이 하는 말 역시 “조심해!”이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조심’의 목록에 는 ‘노동 규율, 법질서, 추위, 음식 및 회식 문화’ 등이 포함된다. 가장 조심 해야 할 것은 노동 규율이다. 사업장 내에서의 안전이다. 주지하다시피 외 국인 노동자의 산재율은 한국인 노동자의 무려 6배에 달한다. 낯선 사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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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호마윤과 함께

에서의 정보 부족이 외국인 산재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사하닷은 공장에서 서두르지 말고 조심할 것을 가장 강조한다. “한국 공장에서는 기계를 많이 쓰잖아요. 다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그 냥 만지지 말고 한국 사람들에게 꼭 물어보고, 먼저 설명을 들은 후에 만지 라고 말해주곤 해요.” 준법정신 혹은 질서 의식도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익혀야 하 는 새로운 규범이다. “한국의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해줘요. 길거리나 은행 등 어디서나 요. 한국 사람들은 잘 지키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안 지키거든요. 운 전을 할 때도, 면허를 반드시 먼저 따고, (오토바이의 경우) 헬멧을 꼭 써야 한다는 것도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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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음식의 차이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만 하는 중요한 관문에 해당한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한국의 겨울은 혹 독하기만 하다. 사시사철 따뜻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사람들은 12도 정도 만 되어도 “추워서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 첫 겨울은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 운 건 참을 수 있는데 추운 건 못 참아요. 그래서 동료들에게 한국 겨울은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야기 해줘요.”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 는 문화 아이템은 ‘종교와 음식(술)’이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 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그들은 형식적이건 실질적이건 모두 종교인으로 태어나고 종교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100퍼센트’종교적인 사람들 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다르다. 종교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는 있 으나 종교적인 삶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백퍼센트 종교적인 사회 방글 라데시에는 종교가 금하는 ‘술 문화’는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술이 메인디쉬 일 경우가 상당수인 한국의 회식문화는 이런 점에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 에게는 가장 ‘조심해’야 할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방글라데시에는 없는 문화는 술 문화예요. 방글라데시에서 술 먹는 사 람들을 본 적이 없어요. 먹는 사람이 있다 해도 몰래 숨어서 먹고, 나쁜 사 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요.”

적응에서 통합으로 : 제도를 활용할 것 한국 생활 적응 ‘기초반’에서 요구되는 기술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경계 심(조심성)이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한국 생활의 어려움은 반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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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적응 ‘심화반’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술이 요구된다. 사 하닷이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방법은 한국의 제도를 체계적이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법무부에서 주관하는 이민자 사회통합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통 합은 이민자들의 한국 사회 적응 및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 램으로, 한국어 및 한국 문화, 한국 사회 이해 교육 등이 제공된다. 5단계로 구성된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이민자들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 진다. 귀화 신청 시 필기 및 면접시험이 면제되고 영주자격이나 거주 자격 신청 시에는 한국어 능력 입증 의무가 면제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하닷은 한국이라는 녹록치 않은 이주의 공간에 소극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넘어, 능 동적으로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매개’이자 ‘통로’로 사회통합 프 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성공적인 전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그는 사회통합 프로그램 이수를 위해 다른 친구들 7명과 스터디 모임을 결성하 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스터디 모임은 계속되고 있다. “오래 살아서 한국문 화를 안다.”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통해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 다. “사통은 수업을 너무 오랫동안 하는 것이 어렵지만 다른 것은 다 좋다고 생각해요. 한국 선생님들이 착하고, 잘 가르치고, 재밌게 가르쳐 줬어요. 한 국 문화, 사회에 대한 내용으로 내용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래 살아서 한 국문화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수업에서 배우는 것도 많아요. (사통을 통해)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면 비자 바꿀 수도 있어요.” 사하닷이 사회통합 프로그램의 혜택을 동료들과 공유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프로그램 참가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이다. 한 지역의 경우 전체 사통 참가자의 70%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에게 프로그램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다. 또 한 가지는 사회통합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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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램을 통해 체류 자격 변경에 성공한 사람들을 모아 공동체 활동을 전개 하는 것이다. 사하닷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비 자변경 2관왕이다.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동료들에게 전수하기를 원한다. 공동체의 이름은 “Get together”이다.

자유의 공간에서 :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비자변경을 통해 적응의 공간을 자유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사하닷이 집중 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우선 사업이다. 2018년 초 시작한 첫 번째 사업의 아 이템은 ‘간식’이었다. 방글라데시 동료들이 한국에 입국할 때 마다 고향에서 간식을 사가지고 온다는 것에 착안하여 간식 공장을 설립하였다. 첫 번째 사 업은 몇 달 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유통경로를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구상하는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은 ‘오 퍼상’, 일종의 중개 무역업이다. 이를테면 방글라데시에서는 ‘저렴한’의상을 수입해서 한국에서 판매하고, 한국의 농기계를 (농기계가 매우 필요한) 방글 라데시에 수출하는 것이다. 사업만큼이나 그가 공들이는 것은 사회 활동이다. 그는 한달에 한번씩, 방 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법률 및 생활 상담을 해주고 있다. 필요 한 경우에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통역에 나서기도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계하는 커뮤니티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다음 목표는 이

Get together 홍보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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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업아이템 방글라데시 간식 '미스띠'

두 가지 일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그를 기반으로 공적인 사회활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자라나 는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 시설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적인 목표다. “한국에서 사업이 잘 되면,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 싶 어요. 그 곳에서 학교 끝난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어도 가르쳐주고 방글라데시어도 가르쳐주는.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한국말만 써서 방글라데시어를 잊어버릴 것 같아요. 계속 가르쳐야 해요.” 이 일을 위해 “직장을 옮길 수도 있고,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도 할 정도로 커뮤니티 기반의 사회활동은 사하닷에게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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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꽃 식물원에서 아내와 딸

아름다운 한국,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 한국의 봄, 가을은 정말 아 름다워요.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살기 편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도, 조심 해야 할 일도 많은 나라 한국에서, 사하닷은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그에게 ‘친절한 사람들의 나라’다. 나아 가 ‘정말 아름다운 나라’ 이기도 하다. 이제 그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하닷은 가족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 2015년 한국에서 잠깐 함께 생활하던 아내는 둘째 임신을 계기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상태다. 아내와 두 아이들이 곧 한국에 입국해 함께 살 예정이다. 이제 여섯 살인 첫째 딸은 아빠를 닮아서 일까 “한국을 많이 좋아”하는 아이이다. “(전에) 서울랜드 2번, 에버랜드 2번, 남산타워, 대부도 등 가족들과 함께 갔어요. 화성 식물원도 갔어요. 하루 종일 사진 찍고 잘 놀았어요. 너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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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어요.”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자유의 공간 한국에서, 그는 소소한 일상을 즐기려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 먹고, 재미있는 일도 많이 하려 한다. 머 지않아 가족들이 오면, 더 재미있는 주말을 보낼 계획을 짜기 위해 사하닷 은 더욱 바빠질 것 같다.

에필로그… 사하닷은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기변화 에 개방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자기변화를 시도하려면 변화의 근거와 목표 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전제될 수 있어야 한다. 사하닷은 이 모두를 갖춘 사람 이다. 엘리트 정치학도였던 그는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안타까 운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 다. 이주국 사회에서 그의 냉철한 현실 인식은 빛을 발한다. 엄청난 문화적 차 이가 있었지만 그가 집중한 것은 제도의 활용이었다. 그의 전략과 노력은 성 공하여 사회통합프로그램 제도의 최선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한국은 적응의 공간을 넘어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재평가되었다. 그의 삶의 공간이 한국과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와 한국으로 확장된 것이다. 확장 된 삶의 공간에서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그는 자신의 자유와 선택지가 늘어 난 삶의 노하우를 동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나누어 주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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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에너지 (시타람, 귀환 이주노동자,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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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시타람은 네팔 돌라카 출신의 귀환 이주노동자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09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2016년 귀환할 때 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네팔에서는 도둑질이나 사업을 하기 전에는 획득하기 어려운 1억원이라는 거금을 벌 수 있었다.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10년 전에 한국어 초짜였던 그는 현재 누구보다도 유능한 한국어 강사이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는 숙련인력(E-7) 비자 취득에도 성공하였다. 목표지향적이되 친화적이 며, 순응적이되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누구보다 열렬한 친한주의자이며, 한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 현재 네팔에 설립된 ‘NEKO HAPPY DREAM’ 이라는 NGO의 책임자이자 한국어강사로 일하 고 있다. NEKO는 NEpal 과 KOrea의 첫 두 음절을 결합한 사명이다. 네팔 로 돌아간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인프라가 전혀 없는 네팔에서 제조 업체를 경영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2층집을 짓는 것 이다.

목적을 위한 삶1 : 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대부분의 성공한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시타람 역시 매우 목적 지향 적이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를 구현하는 일에 집중 된다. 그들은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시타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타람이 한국을 택 한 이유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한국에 가려면 무엇보다도 한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한국어와 부 의 축적, 이 두 가지 목표를 시타람은 이미 이루었다. 한국에서 7년간 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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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그는 ‘1억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네팔에서 1억이란 ‘도둑질을 하던지 큰 사업을 해야’만 가능한 큰돈이다. 한국에서 번 돈의 일부를 투자한 네팔 부동산의 가치도 ‘1억 정도’이다. 그 돈을 벌기(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7 년간 거의 쉬는 날 없이 ‘보통 12시간씩’ 일을 했다. 때로는 ‘아침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보통은 12시간 일했어요. 언젠가는 한 15시간씩 한 적도 많고. 토요일에 도 일하고, 일요일에도 일하고. 겨울에는 밤 12시까지는 기본이고, 한시, 두 시, 세시는 가끔씩.”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그는 결코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부모 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가르쳤으며, 매제에게는 사업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잘 관리만 하면 되는 상황이 되 었다고 자족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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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리고 돈도 많이 벌어야 되고. 60되면 그때 놀러 다녀야 되요.”

목적을 위한 삶2 : 저는 좀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한국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한국어 능력 시험 4급 합격’ 했을 때라고 말 할 정도로 그의 한국어 사랑은 극진하다. 그는 현재 NEKO의 한국어 교원 이기도 하다. 한국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그의 노력 역시 남달랐다. 한 국에 입국하기 직전인 2007년 그는 한국어 공부에 입문했다. 한국어 학원 에서 두어 달 수강한 후 매일 두세시간씩 오로지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혔 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다섯 명의 친구들 가운데 자신만, 네팔 현지에서 치 러진 고용허가제 입국을 위한 한국어능력 시험에 합격하였다. 한국에 입국 한 후에 그의 한국어 공부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한국인들과는 무조건 한국 어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쉬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한국 드라마” 만을 시청했다. 다른 이주노동자들과는 한국어로 채팅을 했다. “한국어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한국생활 하려면 한국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원래 공부를 좀 자랑스럽게, 좀 열심히 하는 편이 에요.” 그렇게 한국에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한국어로 대답까지 할 수 있는 실 력”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한국어 공부는 중단되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비자 전환이다. “E-7 비자를 받게 되면 한국에 계속 있을 수 있다고 들어서 열심히 했어 요. 한국에 더 있기 위해서. 그 전에도 한국어공부를 했지만, E-7 비자를 얻 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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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한국어 “초급, 중급” 과정을 차례대로 이수했고, 한국어 능 력 시험에 합격했고, 비자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자 전환에 성공한 이 후에도 그의 노력은 계속된다. 10여년 전에 한국어에 입문한 그는 이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이다. 시타람의 목표는 이제 잘 배우는 것에 서 잘 가르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공부 많이 했어요. 유투브로도 했고, 책들도 많 이 보구요. 다른 선생님들 책들도 많이 보고. (그것들을 참고해서)제일 쉬운 방법으로 저는 제식으로 가르칩니다. 시간 오래 걸려도 알아듣게.”

어려움과 장애물들 : 너무 힘들었어요. 시타람은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이룬 사람만이 내보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유와 자신감으로 충만해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여유와 자신감은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3번이나 유급을 했을 정도로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한국에 가서 많은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그를 바꾸어 놓은 셈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때는 공부를 못했는데 다음부터는 공부를 잘했습니다.” 한국에 입국해서 그가 “너무 힘들었었다.”고 고백하는 어려움의 목록들 역시,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경험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입국 초기 그의 어려움은 한국어, 혹독한 노동 환경과 사업장 차별 그리고 기후, 이렇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사업장에서 그는, 네팔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근력이 필요한 육체노동을 담당해야만 했다. ‘너무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렇게 힘든 일을 했지만, ‘최저 임금 혹은 그 보다 낮은 시급’을 받거나, 아예 ‘돈을 못 받고’ 퇴사를 해야만 했던 적도 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 문에 승진에서 배제된 적도 있다. 자신이 기능을 가르쳐준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 한국인 직원이 먼저 승진을 하는 경험은 그에게도 ‘안 좋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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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KO에서 한국어 강의 모습

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반장님은 사실은 제가 가르친 분이에요. 반장님인데 한국분이잖아 요. 나는 외국인인데. 저보다 그 회사에 한 3년 뒤에 오신 분이고, 반장이 되 고. 외국인한테는 안 시켜줘요. 그거는 실제로는 조금 기분 나쁘기는 해요.”

어려움, 그 까짓 것 : 저는 강한 사람이에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네팔로 귀환한 이후에도 몇 차례 어려움이 있었다. 두 차례나 경제적인 사기를 당한 것이다. ‘경제(돈)’는 지난 7년여 그의 모 든 것이다. 여전히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런데 대출과 부동산 사기를 당해,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 비는 있다. 차이는 누군가는 그것에 굴복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이겨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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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일 것이다. 시타람은 후자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는 울지 않았다고 한 다. “우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강한 사람이니까요.” 어려움이 그를 찾아왔을 때 오히려 그는 도전적이 된다. 그 어려움을 즐 기려고 한다. “그냥 저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누가 어렵다고 하면 그 일 어떤 일인지 그렇게 어려워요 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그 일을 하게 되면 성공되면 제가 잘했다고 더 격려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는 사업장 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사장에게 오히려 이렇게 요청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는 일이 힘들수록 사장님에게 이렇게 요청하곤 했어요) 잔업 많이 주 세요. 돈 많이 주세요. 일 많이 할 수 있어요.” 도전적이면서 시타람은 친화적이다. 대상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그는 그 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린다.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는 한국인 동료들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한국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배 울 수 있었다. 한국의 명절 연휴에, 혼자서만 기숙사에 있어야 할 시타람이 안쓰러워 자신의 본가에 데리고 갔을 정도로, 사장님 역시 그를 각별하게 챙겨주었다. 시타람은 적응력도 뛰어나다. 이주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대 표적인 아이템은 음식이다. 시타람도 초기에는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는 이내 적응했다. 적응을 넘어서서 ‘한국 음식을 다 좋아’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에는 네팔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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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회)’ 까지 포함된다. “처음에는 (한국 음식) 안 맞았지만 먹다보니 습관 됐습니다. 그리고 후에 나머지 음식들도 모두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음식 다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못 먹어본 음식이 없습니다. 저는 바다고기 제일 좋아합니다. 지 금 굴 나올 때가 아니에요? 항상 맛있는데 있고, 맛없는데 있고. 회도 다 먹 었습니다.”

NEKO HAPPY DREAM : 제가 다 관리를 합니다. 시타람의 현재 직장은 카트만두의 NEKO HAPPY DREAM이다. 네코는 한국인이 시타람과 같은 네팔의 귀환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해, 네팔 현지에 설립한 NGO이다. 네코의 사업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영리 분야뿐만 아니 라 비영리 분야도 포함된다. 김치 공장을 포함한 농축산업, 문해 학교를 비 롯한 인프라가 취약한 네팔 시골의 교육 시설 지원 사업, 한국어 어학원 운 영 등이 주력 사업이다. 시타람은 카트만두 네코의 책임자이자 한국어 어학 원 강사이다. 어학원은 3년 전에 설립되었다. 평균 60명 이상의 수강생이,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한국어 능력 시험 합격을 목표로 공부한다. 시타람 은 한국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네팔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어학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다. 카트만두에는 ‘한국어 어학원이 없는 건물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 ‘한 건물에 두 학원이 있는 곳’도 드물지 않을 정도로 한국어 붐이 불고 있다. 시타람은 다른 학원에 비해 저렴한 수강료를 받되, 양질의 교육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십분 활용한다. 시타람과 네코와 의 인연은 그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체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활 동하던 지역의 이주민 지원센터 대표가 바로 네코의 대표였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시타람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네코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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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친구들과 함께

네팔의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일을 해온 바 있다. 네팔 귀환 후에 그가 사업 구상을 보류하고 네코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그 대표의 권유 탓이었다. “대표님이 그냥 같이 일하자고, 한국에서 일해도, 네팔에 가서 일해도 같 이 일하자고 했어요. 대표님하고 같이 생각이 맞아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한국에 있을 때도 많이 얘기했어요.” 그런 면에서 네코는 단순한 NGO가 아니다(NEKO는 NEpal 과 KOrea의 첫 두 음절을 결합한 사명이다). 네팔과 한국, 한국과 네팔이 연대한, 초국 가적인 사회적 기업인 셈이다. 바야흐로 성공한 이주노동자 시타람이, 네코 를 통해, 성공적인 초국적 사회적 기업가라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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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다 좋아요. : 그래도 가족이 먼저죠. 시타람은 자생적인 열혈 ‘친한주의자’이다. 그는 7년여의 한국 생활 중 “안 좋은 일은 거의 없었다.” 고 말한다. 한국의 모든 것이 ‘선진적’이라고 평가한다. 한국은 ‘법질서’는 물론이요, 음식 문화도 ‘발전적인’ 국가이다. “한국은 법이 잘 돼 있다고 생각해요. 음식에 대해서도 다 한국은 다 발전 이 많이 돼있고, 네팔에는 기본이 안 돼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군대’나 집단적인 ‘회식’ 문화 조차도 그에게는 매력적이고 유익해 보인다. “한국의 군대문화는 좋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람이 함께 살면서 문제해 결 능력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잖아요.” “저는 한국의 회식문화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장님이 계속 맛있는 것 사주시고 1차, 2차, 3차 먹고, 재밌고, 직원들끼리 사이도 좋아지고.” 그 밖에도 그가 7년여의 한국 생활 동안 확인한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장점 은 매우 많다. ‘열심히 일하는 것, 예의를 지키는 것, 시간을 지키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순서를 지키는 것, 양보하는 것, 규칙준수, 준법정신, 잘 갖춰져 있 는 사회보장 제도’ 등은 선진사회 한국의 미덕들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 사회 에 계속해서 체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E-7 비자 소지자임으로 일정 기간 이 경과하면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네팔을 선택했다. 가 족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있었으면 영주권으로 바꿀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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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KO 6주년 기념식 및 문해학교 시낭송

오라고, 결혼하라고, 너무 늦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귀국하는 것을 선택하 게 된 것이지요.” 그에게 가족은 ‘모든 것을 다 포기’ 해도 괜찮은 최종적인 목적이다. 이주 를 통한 부의 획득도, 외국어의 습득도, 초국가적인 사회적 기업의 경영도, 가족의 연대와 결속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압도할 수 없다. “저 같은 경우 가족을 위해서 다 포기하고 일을 계속 하고 있잖아요. 가족 이 가장 중요해서 저는 온 가족과 같이 살자고 제안했어요.”

꿈은요 : 가족과 함께 한국과 함께, 네팔의 미래를 그의 꿈은 두 가지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없는 네팔’ 사회가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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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들에게 미래를 제공해 줄 수 있도록 작은 기여를 하는 것이다. 네팔에 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그는 ‘제조업체’를 운영할 꿈을 꾸고 있다. 제조업의 인프라가 전무한 네팔에서 그것은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제조업이 없으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다 사서 먹는 거잖 아요. 이제까지 우리가 입었던 옷이랑 먹는 것까지 우리가 다 수입해야 하잖 아요. 저는 수출입 사업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라에 도움이 안 되거든요. 여기 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조업이죠.” 또 하나의 꿈은 집을 짓는 것이다. 부모님과 형제들,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10개 정도의 방이 있는 2와 1/2층 규모의 집을 짓는 것이다. 이 집에 서 그는, 자신의 지원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현재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생활하고 있는 동생이 귀환하는 그때까지, 온 가족이 더불어, 서로를 지켜

가족(왼쪽부터 아내, 아들, 시타람, 동생, 제수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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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수 있기를 원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한국과의 교류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 익숙해진 한국의 포털이나 정부 사이트를 통해 ‘실시간 정보’를 획득하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 노동자들과의 교류’ 도 계속하고 있다. 자신의 새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족을 향한 사랑 과 책무 그리고 한국 사회와의 튼실한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시타람은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는 일단 목표를 정하면 그것을 실현 하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난관과 어려움은 그를 좌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게 만든다. 목표의 실현은 또 다른 목표의 설정으로 이어진다. 시타람이 이처럼 철저한 목표지향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된 동력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무다. 그리고 자기 계발을 위한 끊 임없는 노력이다. 주변의 (그가 비록 외국인, 곧 한국인일지라도) 올바른 충 고를 수용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다. 그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성취들을 업그레이드 시켜나갈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실들을 사회적으로 나누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의 목표가 설정되는 공간은 이제 한국과 네팔, 네팔과 한국 사이로 확장되었다. 개인적 부의 축적이라는 목 표는 네팔의 미래를 위한 제조업체 설립이라는 목표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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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를 누벼라, 나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아리오나, 결혼이주여성,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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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리오나는 울란바토르 출신의 몽골 여성이다. 2006년 고용허가제로 입 국, 안성의 순대국 공장 노동자로 출발한 그녀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소중 한 세 아이의 엄마요,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존중하고 믿어주는 한 남자의 아내이며, 불경기를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는 식당과 노래방의 사장님이요, 지역 초등학교 시간제 한국어 및 몽골어 교사요, 이주민지원센터의 상담활 동가이며, 공동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2013년 방송 통신대에 입학한 늦깎이 법과대학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한 가지만 제대로 해도 칭찬받아 마땅할 만한 이 많은 일들 가운데 그 어느 것 도 그녀는 대충 하는 적이 없다. 그 모든 일에서 예외 없이 그녀는 혁신적이 며 동시에 헌신적이다. 그 어느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그녀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후회 역시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슈퍼우먼의 전형, 아리오나 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출발은 슈퍼 능력이 아니 라 슈퍼 좌절이었다. 몽골을 떠나기 직전 그녀의 인생은 만신창이 상처투성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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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였다. 이모가 보내준 비행기표 한 장 달랑 들고, 상처뿐인 그녀가 찾아온, 이주민에게 결코 관대하거나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는 후발이민국가 대한 민국, 그 낯선 이국땅에서 모든 악조건을 보란 듯이 이겨내며 그녀는 당당 하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도대체 하는 일이 몇 개야? : 힘들죠. 그러나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 어요. 한국 생활 13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몽골 출신 결혼이주여성 아리오나는 바쁘다. 그녀의 활동 영역은 말 그대로 전방위적이다. 순대국 만드는 공장 에서 일했던 전직 이주여성노동자였던 그녀는 현재 주말이면 ‘대기’해야 입 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식당과 노래방의 사장님이며, 다문화 강 사이며 초등학교 한국어 및 몽골어 강사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이틀은 지 역의 이주민지원센터에서 상담과 통역을 하는 자원활동가이자 ‘세계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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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몽골’ 공동체의 회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몽골에 있는 세 동생의 든든 한 후견인이며,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세 아이들의 어머니이며,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하다. 방송대에 재학 중인 법학도이기도 하다. 본인 스 스로도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때로는 힘에 부쳐 그 중 한 두 가지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적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앞으로 는 일을 조금 줄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덧붙인다. “이제까지 너무 많은 일을 해서 이제부터는 몇 가지만 잘 할 거예요.” 그러나 짐짓 엄살처럼 들린다. 그녀가 고백하는 어려움보다 그녀가 확신 하는 긍지가 훨씬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녀의 사업 기술 - 먹는 공간을 관계의 공간으로 아리오나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대충하는 법은 없다. 한국 요식업계의 폐 업율은 전산업계 평균의 두 배를 상회한다. 경쟁이 가장 치열할 뿐만 아니 라 공급과잉으로 생존 자체가 매우 어려운 분야임을 뜻한다. 그러나 아리오 나의 식당은 날로 성장 중이다. 4년 전 유동인구가 없는 변두리에서 보증금 500만원 월세 35만원에 시작한 그녀의 식당은 현재는 보증금 3천만원에 월세 120백만원의 핵심 상권에 자리하고 있다. 이따금씩 도와주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직원은 한 명도 없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무서워 홍보를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업은 날로 번창중이다. 그녀의 ‘차별화’ 전략 탓이다. 그녀는 오는 손님만큼이나 찾아가는 고객 서비스에 주력한다. 바로 배달이다. 몽골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업체에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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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입맛에 맞는 식사를 제 때에 배달해주기 위해서는, 철저한 시간 관리와 메뉴개발이 필수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시간을 지키고 결코 같은 메뉴를 연 속해서 내놓지 않는다. 또 하나는 고객과의 신뢰관계 구축이다. 그녀는 손 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맛 품평)을 존중한다. 불만이 만족으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그녀의 식당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곳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긍정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관계의 공간’으로 격상된다. 그 녀가 그간 식당을 운영하면서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임대료 걱정을 하거 나 손해 본 적은 없다.”가 자신하는 이유들이다. “전에 노동자로 일할 때 한국음식이 안 맞기도 하고, 몽골음식 먹고 싶었 어요. 못 먹으면 스트레스 받아요. 누구나 자기나라 음식을 먹고 싶어 하잖 아요. 힘들게 일하고 집에서 밥 못 먹을 때 우리 식당에 와서 먹고, 친구들 만나서 수다도 떨고… 그렇게 스트레스 풀고 나면 다음날부터 다시 신나고 힘 있게 일 시작할 수 있거든요.(제가 우리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바 로 그런 거예요.)”

그녀의 상담 기술 - 문제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건 신뢰관계를 쌓는 거예요. 몽골어 상담이나 통역 지원 같은 비영리 영역의 일들은 보람 있지만 결 코 쉽지 않다. 내담자에게 절박한 일들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모른 척 할 수 가 없다. 그러나 모든 내담자가 결코 예의바르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들이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은 더욱 어렵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아리오나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 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야의 전문 기술과 지식을 부단히 습득하려고 노 력하는 것이다. 아리오나가 생각하는 상담의 원칙은 ‘사례를 받지 않는 것’ 으로 압축된다. 문제를 해결해주었을 때조차도 그녀는 감사의 사례는 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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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사양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사례를 사양하는 것이 관련된 내담 자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내담자들과의 ‘신뢰 관계’ 역시 공고히 해줌으로 써, 보다 성공적인 상담 활동의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확신한 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공적인 문제는 돈이 아니라 공적인 과정으로 풀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내담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제 생각에는 그런 믿음을 주고 지키고 잘 되게 하려면 성실하게 잘 해야 해요.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상담을 통해 문제가 해 결되었다고, 선물을 주거나) 돈을 줄 때 거절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 아요.”

그녀의 공부의 기술 - 쉽지 않지만, 포기란 없어요. 2013년 그녀는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한다. 바로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입학이다. 아리오나에게 법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에서 그녀는 법 학도였다. 부모님은 그녀가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셨으나 그녀는 법학을 선 택했었다. 그러나 법관이 되고 싶은 그녀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비록 법관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법학 공부는 그녀로 하여금 법을 지키는 삶의 중 요성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변호사가 되지 않아도 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법이 사회구성원들 모두의 공정한 규범으로 공유되는 준법적인 삶 혹은 법치주의는 특히 몽골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법치주 의가 자리 잡지 못한 사회는 ‘무질서’ 할 뿐만 아니라, ‘인권과 자유’도 보장 되지 못한다. ‘법’은 그녀가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와도 직결된다. 법치주의 가 체계화된 한국 사회는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장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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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리나가 운영중인 식당 모습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몽골인 통역 상담가로서 아 리오나에게 법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내담자들에게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면 한국의 관련 법제와 법률 용어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아리 오나는 법적인 지식의 부재로 적절한 통역을 받지 못해 내담자들이 ‘그냥 포기하고 손해를 보는’ 상황이 계속되기를 원치 않았다. 몽골에서 법학 전공자였던 그녀에게도 그러나 한국의 법제와 법률 용어 는 미지이자 동시에 무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선택은 포기가 아니라 도전이었다. 통역 상담가로서의 자기 개발을 위해 그녀는 법대 진학 이라는 도전을 선택한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그렇지 않아도 없는 시 간에, 한국의 대학에 입학해 다시 면학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울 수 없는 결정이다. 아리오나가 하는 모든 일은 그렇다. 쉽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그 쉽지 않은 일을 선택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만의 길 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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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똑똑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배우는데 힘들어요. 도서관도 가기도 하고 많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거예요. 도서관에서 출퇴근하는 것처럼 공부를 했어 요. 1년 정도 열심히 배우면 졸업할 수 있는데, 식당일 때문에 집중이 안돼서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법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자신의 일에서 긍지를 느끼려면 - 하던 대로 하지 않아요. 아리오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그 일들 가운데 어떤 것 도, 하던 대로, 관행대로 ‘그냥’ 하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다. 그녀는 자신 이 택한 분야에서 공유되던 관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과감한 변화를 모색한다. 변화에 대상에는 자신 역시 포함된다. 일을 통해 자신의 고정관념과 통념을 조망하고 수정하 는 데에 있어서 그녀는 주저함이 없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그녀가 회 장을 맡고 있는 몽골 공동체의 운영 방식이다. 지금까지 공동체는 ‘회원제’ 의 형식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한 관행을 그녀는 개방적인 ‘행사 중심’으로 과감하게 변화시켰다. 그녀는 ‘세계인의 큰 잔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몽골인들의 부정적인 습속(음주 및 싸움 문화)을 객관화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를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지역의 초등학교에 출강할 때 그녀의 교수법이다. 그녀는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몽골 출신 학생들에 게 한국어와 몽골어를 가르치는 시간제 강사이다. 각기 나이, 수준, 취향 이 다른 아이들을 동시에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 녀가 고안한 방법은 ‘서로에게 배우게 하기’이다. 교사가 학생들을 동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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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서 몽골음식 판매부스 운영 모습

인 집단으로 간주하는 일방적인 교수법으로는 결코 효과를 낼 수 없다고 판 단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배우게 하기와 더불어 그녀가 구사하는 또 다 른 교수법은 ‘자유롭게 말하게 내버려 두기’이다. 보다 특별한 교사로서 의 그녀의 역량은 ‘배울 수 있는 능력’에서 확인된다. 특정한 교육한 영역 에서 훌륭한 교사의 특질을 ‘FAT’으로 압축하곤 한다. 훌륭한 교사는 신뢰 감 있고(faithful), 아이들이 원하는 영역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 야 하며(available), 학생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teachable)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리오나는 훌륭한 교사임에 틀림없다. “수업하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됐어요. 제가 몽골식으로 생각하고, 아이 들이 제 예전에 살았던 방식으로 큰다 라고 생각했어요. 여기 강의 시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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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니까 깜짝 놀랐어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초 등학교에서 공부하는 방식과 부족한 것, 선생님들에게 행동하는 방식, 고민 들을 알게 됐어요.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제 생각이 전부가 아니며, 제가 배운 방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을 어떤 방향으로 키워야 하는지 알게 됐어요.”

제가 슈퍼 우먼이라구요? : 출발은 슈퍼 좌절이었어요. 보통사람이라면 한 가지도 어려운 다방면의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 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아리오나의 모습은 전형적인 슈퍼우먼을 연상시킨 다. 그러나 그녀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딘 2000년대 중반 그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1녀 3남의 맏딸이자 외동딸로서 부모의 기대와 지지를 한 몸 에 받고, 법관을 꿈꾸며 법과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일생일대의 위기를 경험한다. 첫 사랑이었던 남자친구의 배신이 그것이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랑의 배신으로 그녀는 “삶이 무너진 것” 같은 좌 절과 분노에 빠진다. 그 혹독한 좌절의 시기, 부모님이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보라.”고 권유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상처투성이인 딸을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때 문이었을까? 그녀의 아픔을 위로해주려고 함께 기도해주었던 친구의 우정 때문이었을까? 대한민국이 그녀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녀 안에 잠재해있던 슈퍼우먼의 포텐을 터뜨릴 수 있게 해준 축복과 기회의 땅이 되어 준 것은 틀림없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첫 인상은 ‘좋음’ 그 자체였다. 물론 경험적 으로 이제는 한국 사회 역시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 래도 “한국 사람들이 다 좋다.”는 그녀의 믿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한국 사람을 처음부터 좋은 눈으로 봤어요. 나쁜 사람 만난 기억이 별로 없어요. 계속 좋은 사람 만났어요. 한국 사람들 다 좋다고 얘기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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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 수업 모습

뭐니뭐니해도 그녀에게 결정적으로 좋은 한국 사람은 현재의 남편이다. 2006년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만난 ‘몽골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한국 인 남자’는 그녀가 “기도와 소원이 이루어 졌다.”고 느낄 정도로 있는 그대 로의 그녀의 모습을 인정하고, 여전히 그녀의 방식과 선택을 존중해주는, 슈퍼우먼의 소중한 조력자이다.

꿈과 계획 : 아이들이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 상처는 그녀를 단단하게 했다. 그녀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은 그 단단함 이 물리적 성취의 도구를 넘어 다른 이들의 상처를 싸매줄 수 있는 새로운 치유의 역량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제 성격이 내 삶이 힘들어도 다른 사람을 도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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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있는 세 동생의 후견인 역할(둘째와 셋째 동생은 한국에 초청 공 부를 시켰고, 첫째 동생에게는 자동차 정비소를 차려줌)을 하고, 몸이 망가 질 정도로 여러 일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천원, 이천원 쓰기를 주저하면 서도 공동체를 위해서는 몇십만원의 사비를 흔쾌히 쾌척하며, 직원도 없이 성공적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대학 공부까지 하는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 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무너졌던 그녀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부 정적이었던’ 그녀를 ‘긍정적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전에는 자신이 없어서 제 생각이 맞아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는데 지 금은 자유롭게 얘기해요. 지금은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맞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당분간은 조금 힘들고 피곤할 수 있 지만 금방 지나갈 거야라고 생각해요.” 그런 그녀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도전의 영역이 있다. 어찌 보면 가장 소 중하지만, 가장 익숙해서, 잊고 있던 영역인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의 아이 들이다.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인생에서 아이들이 가장 중요해요. 그간 일에 치 여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어요. 이제는 아이들과 있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어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아이들이 더 좋아지고 더 안전해지는 세상’, 아리오 나는 이제 그 세상 만들기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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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사진

에필로그… 아리오나가 슈퍼좌절을 딛고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이유를 몇 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 한국에서 성공하겠다 는 것, 그리고 가족들(동생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의 남다른 점은 그녀가 설정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차별적이고 전략 적인 방법들을 택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 어떤 일(사업도, 상담도, 공동체 운영도, 아이들 지도)도 결코 ‘하던 대로’ 하지 않는다. 선례가 없는 외로운 길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강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는다. 그녀의 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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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점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회피하기 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다 는 점이다. 법대 진학이 이에 해당한다. 그녀의 성공적인 삶의 결실들은 한 국뿐만 아니라 (몽골에 있는 동생들에 대한 지원을 통해) 몽골 사회에도 공 유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녀가 목표로 한 많은 것들을 이뤄낼 수 있었 던 가장 큰 원동력은 가족(남편과 아이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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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엉’ 반장 (엉묘진, 이주 노동자,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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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엉묘진은 미얀마 양곤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 이제 서른 한 살의 젊은 청년이다. 2014년 2월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대학 졸업 후 광산에서 폭파전문가로 일하는 엘리트 직장인이었다. 평택의 ‘홍반장’이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아주 바쁘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는 자동차 부품 제조 및 도장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3년전에 만들 어진 평택 미얀마 공동체의 설립자이자 대표이며,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불교 시설이자 쉼터인 담마야나 사원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주말에도 그는 쉴 틈이 없다. 거리 청소 등 사회봉사, 한국어 가르치기, 통역 및 상담 활동 등이 그의 일이다. 미얀마 쉬바다이에 설립한 어린이 도서관을 관리하 는 것도 그의 몫이다. 미얀마 양곤에 세운 그의 의상업체를 원격으로 경영 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이제 그는 귀환을 앞두고 ‘사업’과 ‘공익’이라는 두 분야에서의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성공을 꿈꾸고 있다. 그에게 한국은 올 마 음이 없었던 곳이다. 그의 한국 생활 초반부는 눈물흘릴만큼 고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다중적인 악조건 속에서, 그가 이처럼 전방위적인 영역 에서 성과를 올리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과 꿈을 기획할 수 있 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시련과 어려움 : 오고 싶지 않았어요. 엉묘진의 한국행은 대부분의 이주민들과 구분된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 행은 강력한 의지와 욕구, 노력의 산물이다. 이따금은 ‘우연’이 ‘한국행’이 라는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엉묘진의 경우는 다르다. 그 역시 한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무려 10여명 이상의 사촌들이 한국 생 활을 했고, 그들 모두가 ‘다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 더라도 그에게 한국에 올 마음, ‘한국에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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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기 전에 엉묘진은 프라이드가 강한 미얀마의 엔지니어였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전공을 살려 졸업 후 바로 광산회사에 입사해, 다이나마 이트 폭파 전문가로 일했다. 당시 미얀마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이 20만원 에서 30만원 사이였는데, 엉묘진의 월급은 그 두 세배에 달했다. 고수익 전 문가인 그가 ‘마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행을 선택해야만 했던 이 유는 바로 어머니의 권유와 설득 탓이었다. 엉묘진의 부모님은 모두 교사였 다. 그리고 친지들에게 늘 도움을 베푸시는 분들이셨다. 결코 많지 않은 교 사의 급여로 여러 친지들을 돕다 보니 가정의 경제상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께서 엉묘진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셨던 것이 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버는데 잠깐 가서 일하라고 했어 요.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 어머님이 계속 설득해서 왔어요.” 일단 한국행을 결심하자, 엉묘진은 바로 한국어 공부에 돌입했다.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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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정도 친구로부터 한국어 교습을 받은 후 시험에 응시, 단번에 합격했다. 합 격 후 2년 정도 대기 한 후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시련의 연쇄 : 한국에 온 후 너무 고생 많았어요. 열망하고 소망하던 곳일 지라도 이주의 공간은 혹독하게 경험될 개연성 이 매우 높은 곳이다. 그런데 하물며 오고 싶지 않던 곳이라면 어떨까. 한국 에 입국한 후 엉묘진의 ‘시련과 고생’은 본격화된다. “한국에 온 후 너무 고생 많았어요. 한 2년 정도는 눈물이 나고 그랬어 요.” 그를 힘들게 했던 첫 번째 사유는 대부분의 이주민에게 해당하는 언어적 인 스트레스였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말을 전혀 못했어요. 뭐라고 하는지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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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저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라서 그게 너무 어려웠어요. 제가 실수 한 게 아닌데 저한테 욕해도 거기에 한국말을 할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너무 많았어요.” 이주공간에서의 익숙하지 못한 의사소통의 스트레스가 엉묘진에게 더욱 심각하게 경험된 것은 출신국과 이주 공간에서의 ‘지위의 격차’ 때문이었 다. 그는 미얀마에서 일반적인 근로자들에 비해 고액의 연봉을 받던 엘리트 전문가였다. 그러나 한국 사업장에서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미얀마에 있을 때는 제가 다른 사람 일을 시켰는데 한국에 와서 일할 때 는 저 다 시키고 욕하고, 그게 마음이 불편했어요.” 대우와 존경을 받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광산업)”을 하고 있던 그가, “그것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말 도 못 알아듣고, 심지어 이유 없이 욕을 먹어야만 상황을 감당하는 일이 결 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업장 안에서의 외국인 차별 역시 그를 어렵게 한 ‘한국에서의 나쁜 경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회사는 제가 싫어하는 식으로 일을 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외국인이 라고 욕도 하고, 무시하고 시키는 거예요. 수당이나 휴가에서 차별도 있구 요. 그래서 회사 안에서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는 좋지 않았어요.” 그를 어렵게 만든 것은 한국인만은 아니었다. 그를 눈물나게 만들 정도로 힘들게 한 사람들 가운데는 어머니와 미얀마 동료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의 불화는 ‘송금 액수’에 대한 불신과 관련되었다. “엄마는 월급이 적어서, 송금액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믿어요. 한 국에서 다른 사람들은 많이 보내는데 너는 왜 그러냐고 그래서 저하고 맨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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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거든요. 제가 쉬운 일을 하고 월급을 적게 받는데 엄마는 믿지 않았어 요.” 그가 선한 의지로, 개인 시간과 사비를 털어가며, 미얀마 공동체를 만들 때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의 진의와 선의를 믿어주는 미얀마 동료들은 거의 없었다. “공동체 처음 만들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는 저도 한국말 하나도 모 르잖아요. 미얀마 동료들이 제 말을 믿지도 않았어요.”

어려움 속, 짧은 시간, 이룬 게 많으시네요. : 그냥 노력하는 사람이 에요. 엉묘진은 2년여, 그러니까 한국 생활의 거의 절반 정도는 ‘눈물이 날 정 도로’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짧은 시간에, 그가 이룬 성취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일단 그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미얀마 양곤에서 의상 사업을 시작했다. 미얀마의 전통 의상을 디 자인하고 제작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현재 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매니저는 동생이다. 사업을 시작한 지는 2년 정도인데 “어느 정도 잘 되고” 있는 중이다. 그는 한국에서 직접 디자인 보내는 일을 한다. 그리고 ‘미얀만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케팅 플랜’을 짜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는 앞으로 이 사업을 ‘더 크게’ 키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인 성취와 전망 이외에 비영리 영역 곧 사회적 참여와 기여라는 분 야에서도 그의 성취는 괄목할 만하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 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엉묘진이지만, 누군가를 돕는 일을 체계적으로 해 본적 역시 없는 그였다. 한국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공간이었다. 그는 한 국에서 경험한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공동체’ 활동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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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처한 “미얀마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보람 있었 다.”고 자부한다. 불법체류자 단속에 억울하게 희생될 뻔 한 동료 노동자를 다양한 관계기관과 주한 미얀마 대사관과의 협업을 통해 구제한 일이 대표 적인 사례이다. ‘자신의 어려움이 반복되지 않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지만, 그의 활동을 통해 평택에 미얀마 사원과 쉼터가 설립되었을 뿐만 아 니라 미얀마 현지에 NGO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사회적 기업가’라는 자신 의 새로운 꿈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서 이룬 또 하나의 성취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전적으로 바 뀌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한국은 오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시련과 어려움 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5년여의 한국 생활은 그러한 그의 생각을 바 꿔주었다. 이제 그에게 한국의 어느 도시는 고향처럼, 혹은 고향보다 더욱 좋은 곳이다. “평택도 미얀마처럼 좋아하는 도시에요. 우리 어렸을 때 사는 고향보다 좋아해요.”

꾸준함은 용감함을 필요로 해요 : 맨 처음 왔을 때부터 한 회사를 다 니고 있어요. 흔히 한 곳에 정주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은 정적이거나 경쟁력이 떨어진 다(선택지가 적다)고 생각하기 쉽다. 현재 엉묘진의 직장은 그가 한국에 입 국해 첫 입사한 첫 직장이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4년 10개월 간 그는 단 하 나의 직장에서만 종사한 셈이다. “한국에 맨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첫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무력하거나 정적이거나 순응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히 려 그 반대다. 4년 10개월을 한 직장에서 근무한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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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거리에서

부가 이러저러한 재취업의 기회를 주고 있음에도, 주저 없이 미얀마 귀환을 선택하는 것이 그였듯이, 별로 좋은 조건이 아님에도 한 회사를 선택하는 것도 그다. “이 회사는 연장이나 야간 휴일근로가 전혀 없어서 생각보다 돈을 적게 벌어요.” 한 회사에 꾸준히 근무함으로써, 돈을 좀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 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두 가지다. 사회 활동과 자기 계발이다. 잔업이 나 휴일 근무를 안 함으로써 생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그는 결 코 여흥이나 유흥의 시간으로 보내지 않았다. 한국어 공부와 이주노동 관련 법 공부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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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한국말 잘하고, 법도 배운다면, 70%정도 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저보다 더 고생하는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사회 활동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공동체와 쉼터를 만들었고, 주말마다 동 료들과 거리 청소를 함께 했다. 그 결과 그는 돈으로 구할 수 없는 두 가지 를 얻을 수 있었다. 한 가지는 사회자본, 곧 신뢰다. 그는 친구가 많다. 몇 달 뒤 미얀마 귀환을 앞두고 있는 그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사람만 도 15명에 이른다. 다른 한 가지는 차별에 대항하는 능력이다. 엉묘진의 회 사에는 근로자들을 홀대하는 ‘난폭한’ 한국인 관리자가 종사한다. 엉묘진 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부당한 지시나 언행에 담대하게 맞선다. 어느 순간부터 관리자는 더 이상 엉묘진을 괴롭히지 않는다. 꾸준한 사람이 되려면,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엉묘진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관리자가 4년 10개월 동안 계속 있었어요. 지금은 저한테는 시키지 않아요. 저도 안하고.”

돈이 전부는 아니죠. :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 았어요. 엉묘진은 한국에 입국한 지 불과 1년만인 2015년 4월 미얀마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100명 이상의 회원이 참가하였다. 만들어진 지 얼 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엉묘진의 공동체는 한국의 미얀마 공동체들 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운영’ 되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공동체는 여러 가 지 활동을 한다. 회원들의 경조사를 챙기고, ‘10월 부추제’와 같은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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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회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미얀마 사람들의 삶의 구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원 겸 쉼터도 운영 한다. 공동체 활동은 회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매주말 거리 청소 등 지역 봉사에 참가한다. 2015년 미야우리 지역에 홍수가 났을 때는 8백 만원 정도의 피해 구제 기금을 마련해 지원한 적도 있다. 미얀마 낙후 지역 의 고아 및 한부모 가정 자녀들을 위한 보육원 지원 활동도 수행한다. 어린 이 도서관과 한국어 교실을 운영하는 쉬바다이 NGO 설립도 공동체 활동이 매개가 되었다. 공동체 창립의 과정은 엉묘진 개인의 열정과 의지에 크게 의존한다. 그는 사람들을 모다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매달 30만원에서 40 만원씩’의 사비를 써야만 했다. 동료 노동자들의 불신과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제가 너무 하고 싶어하는 일이라서 돈을 좀 못 벌어도 괜찮아요.” 그만큼 자신보다 더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미얀마 동료 노동자들을 돕는 일은, 그에게 절박하고 소중한 과제였다. 원치 않는 한국행의 아픔과 무너 진 자존감을 회복시킬 수 있는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 “사람들하고 나하고 힘든 것을 비교해봤는데 제가 스트레스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거기에 미얀마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한 테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공동체를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만들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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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평택 거리 청소

두 가지 성공을 위한 새로운 도전 : 미얀마 최고의 사회적 기업가를 향하여 이제 귀환을 앞두고 있는 엉묘진은 두 가지 꿈을 꾼다. 우선 사업적인 성 공이다. 그러나 한국 생활 내내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 그 이기에, 사업적인 성공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적인 성공이, 성공적인 공익사업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꿈은 성공하는 것이에요. 장사, 지금 하고 있는 장사, 잘 되고 싶어요. 그 거 잘 되면 더 하고 싶어요. 부자 되기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고, 도와주고 싶은 것만큼 도와줄 수 있게 돈 많이 벌 고 싶어요.” 그가 미얀마에서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공익’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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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NGO ‘Future Light’

교육과 일자리를 꼽는다. “맨 먼저는 교육이에요. 학교 못가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거든요. 그 아이 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사회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미얀마에 좋은 일이 많이 없어서 외국에 가 서 일하잖아요. 미얀마에 좋은 일자리 있으면 외국에 안 나가도 될 거에요.” 그는 그렇게 “성공적인 사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그것이 꿈이에요.”라고 말한다. 그 꿈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지 말아야 할 이 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당신의 꿈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엉묘진 화이팅!!

에필로그… 엉묘진은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매우 특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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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다. 한국에 오는 것에 대한 동기화는 고사하고 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 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 덧붙여 가족과 동료들의 불신 등 그에게는 여 러 가지 악조건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짧지만 매우 성공적인 한국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몇 가지를 추론해볼 수 있다. 개방적인 마인드, 뛰어난 적응력, 한 회사에만 근속한 꾸준함과 성실함, 불의와 차별 에 대항하는 담대함과 용기, 한국어를 익히기 위한 노력, 동료들과의 친화 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남다른 점은 대체로 위축되기 마 련인 이주 공간에서 그가 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추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경제적 이익보다도 ‘의 미를 추구’하는 이주노동자였다. 그는 이주공간에서 어려움을 극복한 자신 의 노하우를 동료들과 나누기 위해 사비를 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제 그의 의미 추구의 공간은 미얀마로 옮겨진다. 미얀마 최고의 ‘사회적 기 업’을 향한 그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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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나는 로맨틱 실용주의자 (여인, 결혼이주여성,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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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여인은 북경 출신의 중국 여성이다. 2008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첫 발 을 디뎠다. 그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의 듬직함에 반해 2010년 대 학원 유학생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2018년 현 재, 그녀는 한국의 웹툰 회사에서 웹편집자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자, 인 터넷 보안업체에 근무하는 남편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장점’이기만 한 결 혼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2년차 새내기 신부이기도 하다. 한국어 전공자로 서, 한국어에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으로서의’의 한국살이는 녹록치 않다. 때로는 생각과 문화의 차이는,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으로까지 깊어지기도 한다. 문화와 정체성의 혼란, 한국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 불 투명한 미래 등 여인이 경험하는 여러 문제들은 일반적인 결혼이주여성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 사회가 상상하는 결 혼이주여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의 어려움은 그녀의 도전을 막 지 못한다. 그녀의 동요와 고민은 그녀의 자신감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여 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은 불안 속에서도 그녀로 하여금 ‘되게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가깝다구요? 생각보다 멀어요! : 중국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거리 중국은 지정학적으로는 한국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지리적 가까움으로 인해 문화적 차이는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거리’는 지리적 가까움을 압도한다. 한국어 전공자이며 한국에서 유학했고, 한국인 사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장점은 분명하다. “깨끗하고 질서 있고, 아기자 기” 하다는 것이다. 한국에 비해 규모가 큰 중국 사회는 “관리가 안 되는 부 분”들이 존재하는 데 반해,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질서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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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부모님과 함께한 여행

돌아간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 사회의 이러한 통일성은 그러나 ‘다양성의 결여’라고 평가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성장하면서 당연시했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다양성의 목 록이 한국에서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축소된다. 다양한 유산, 다양한 민족 등 중국에서는 “뭐 그냥 그런 가 보다” 할 정도의 다양성이 한국 사회에서 는 허용되지 않거나 권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이주민의 입 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 : 적응했지만 수용은 안 되는 여인은 10여년의 한국 생활을 통해 적응했지만 여전히 수용은 안 되는 ‘문 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살면서 제가 외국인치고는 한국말도 하는 편이고, 문화도 익숙한 편인데도 이해를 못하거나, 이럴 때 정말” 하고 놀라 게 되는 상황들이다. 우선 외국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이다. “여기는 단일민족이다 보니까 외국인 이라 던지 다른 민족을 볼 때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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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뭐랄까 한국에, 우리 것 아니다 라는 그런 거 있어요.”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는 낯선 언어, 낯선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마주친 다 해도 “그런가 보다.”하고 무덤덤하게 넘어가게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그 렇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 오니까 외국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 달라 져 버린다. 외국인을 향한 특별한 시선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신기해 함”이 한 가지라면, “의문시 함”이 다른 한 가지다. “얘네 어떻게 이래?” 좋게 말하면 신기해하는, 나쁘게 말하면 ‘저사람 뭐 지?’ 하는 그런 거”

내가 먼저 커밍아웃 : 저 중국 사람이에요! 자신들과 다른 존재, 곧 외국인을 ‘그냥 그런가 보다’ 식으로 덤덤하게 보 아 넘기지 않고 특별하게 구분 짓는 시선은 좋은 관점이든 나쁜 관점이든, 외국인 당사자에게는 불편하고 무례한 개입으로 경험되게 된다. 이를테면 음식문화와 관련, 돼지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는 경우, 문화적 다양성이 일반화된 사회라면 ‘아 안 먹는구나.’ 하고 넘어가면 그 뿐이다. 그런데 대 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왜 안 먹어? 얼마나 맛있는데” 하고 반 응한다. 사회문화적 지위가 취약한 이주민들은 주류 사회의 이러한 문화적 구분 짓기가 강요하는 불편한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이 ‘외국인’임을 숨기 는/드러내지 않는 전략을 선택하곤 한다.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한 이주배경 청소년들 대부분이 외적으로 강제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신의 배경을 드 러내지 않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인은 반대다. 여인의 방식은 ‘정면 돌파’다. 여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눈 치 채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자신이 외국인임을 먼저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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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서

“제가 먼저 밝혀요. ‘저 중국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외국인이라는 걸 알 려주고 싶어서예요. 당신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내가 더 좋고 나쁘고 그런 것이 아니고 문화적으로 차이 있고, 생각도 많이 틀릴 수는 있는 사람이다, 그런 걸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같은 문화, 같은 습속을 ‘당연시’하는 한국인들에게, 다른 문화를 가진 외 국인으로서 경험해야만 하는 불편함과 부당함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 여 인은 과감하게 외국인임을 먼저 공개하는 전략을 선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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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결혼식 모습

“(제가 한국인과 문화가 다른 외국인임을 밝히지 않았을 때 대부분의 한 국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더라구요. 너는 이만큼 하니까 너 이것도 알아야 돼 너 이거 모를 리가 없어, 너 그거 몰랐어? 그런 식으로요. 사실 한 국인도 모를 수 있고, 외국인은 더 모를 수 있는 내용들이거든요. 간혹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내용들도 있구 요. 그런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니까, 저는 (제가 외국인이라는 것 을 먼저 밝히는 게) 더 편해요.”

나는 내 길을 간다. : 부모보다는 사랑을, 조국보다는 실용을 그녀의, ‘외국인’으로서의 이러한 당당함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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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건강검진에서 중국어 통역활동

결정하는,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삶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녀 가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정도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했던 한국을 ‘삶 의 공간’으로 결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우선 사랑이다. 교환 학생 시절 그녀는 학교 동아리에서 남자 친구를 만난다. 남자 친구는 곧 헤어져야(귀 국해야) 하는 연인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고 자상했다. 그러한 듬직함으로 남자 친구는 현재의 남편이 되었다. 그녀는 말한다. “한국인 남자친구 없었으면 졸업 후에 중국에 갔을 거예요.” 부모님들은 개방적이고 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분들이셨지만, 한국인 남자 친구와는 “조만간 힘들다”고 혹은 “언젠가는 헤어질 거야.” 하고 생각 하는 분들이셨다. 그러나 그녀는 ‘부모님의 서운함’을 뒤로 한 채 남자 친구 와 부부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한국을 삶의 공간으로 선택한 또 다 른 이유는 실용주의다. ‘전공을 살리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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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한 그녀에게 중국은 ‘전공하고 관련된 일을 하게 될 확률이 적은’ 공간 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전공을 살리는 게’ 되는 기회의 땅이다. 그녀의 사랑과 일에 있어서의 남다른 주체성은 한국에 서 같이 유학했던 중국 친구들 가운데 자신만이 한국을 선택했다는 데에서 도 확인된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간 친구들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는다. 자 신이 한국을 선택한 이유에 확신이 있는 탓이다. “친구들은 거의 다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아마 그때 학교 다니는 아는 사 람 중에 저만 남아 있는 거 같아요. 다 돌아가서 자기 전공을 살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통 전공 살리지는 못한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커리어 빌딩 : 실패는 전공에 적성을 추가할 자기 계발의 동기 그녀가 ‘전공’을 살려 선택한 한국에서의 첫 번째 직장은 6개월 만에 새 드엔딩으로 끝난다. 한국을 찾고자 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맛집, 핫스팟 등을 중국어로 소개하는 관광 가이드 잡지사는 그녀의 적성에 맞았다. 그러 나 임금체불이 이어졌고, 결국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전공과 관련 선택한 두 번째 직장 역시 여행 관련 회사였다. 그녀는 중국인이 주 고객인 온라인 여행관련 사이트에서 10개월간 일했다. 불행하게도 그녀가 일하던 시기 메 르스 사태가 벌어졌고 관광객의 규모는 급감했다. 회사는 유지되기 어려워 졌다. 연이은 두 번의 실패는 비록 자신 탓이 아니더라도 좌절이나 회의주의를 불 러일으킬 만한 경험이다. 그러나 여인의 선택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실패의 끄트머리에서 전공에 적성을 추가하는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한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만화라는 적성을 전공과 결합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4개월 간 웹툰 피디 교육을 이수한다. 현재 그녀가 2년째 재직하고 있는 직장은 바로 그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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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직접 그린 기숙사 친구들 캐리커쳐

툰 아카데미의 추천으로 입사한 곳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중국 시장에 한국 의 웹툰을 진출시키기 위한 가교역할이다. 번역은 물론이요, 계약, 시장 조사 까지가 그녀의 몫이다.

전공을 살리니 휴머니즘은 덤 : 그녀의 엔지오 활동 그녀가 ‘전공을 살려’ 일하는 공간은 영리적인 기업만이 아니다. 그녀는 시간이 나거나, 특별한 요청이 있을 때, 인천지역의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 에 나가 중국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상담활동가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담을 통해 이주민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어려움들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급여, 산재, 사회 통합 등이 그것들이다. 누군가에 게는 삶 전체가 걸린 절박한 문제들이 단지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묻 혀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자주 할 수 있을 만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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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내긴 어렵지만 중국어 상담이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자신 의 기여를 과장하지 않는다. “상담의 보람은 제가 중국어하고, 한국어 하니까 저한테는 크게 어려운 거 없지만, 작은 노력으로 사람들을 돌봐줄 수 있는 그런 거, 일종의 성취감 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것 같아요.”

심각하다, 그러나 회피하지 않는다. : 정체성에 대한 고민 결혼 초기 그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한국의 가부장적 가사문화, 직 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해는 가지만 수용하기는 어려운 위계적인 조직 문 화보다도, 그녀를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정체성의 문제다. 대부분의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국적(정치) 공간과 삶 (사회문화)의 공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중국인’이지만 ‘한국의 사회 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화적 차이를 압도하는 정체성의 스트레스를 이렇게 토로한다. “중국인인데 한국에서 살고는 있고, 어떻게 보면 제가 생소했던 공간에 서 살게 되고, 제가 잘 아는 공간하고는 멀리 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내가 대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그런 고민을 하 게 되더라구요. 나는 중국 사람일까 한국 사람일까? 그게 지금 단계에서는 저한테 제일 큰 어려움이에요.” 이러한 고민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더욱 끝 모를 나락 속으로 빠져들게 되 는 경우는, 이주민들에게 ‘문화매개자’라느니, ‘민간외교관’이라느니 하는 비록 선의에 근거한다고는 하지만, 비현실적인 주류사회의 기대감들이 추가 될 때이다. 짐짓 아니더라도 그러한 기대를 수용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으련 만, 그녀는 그러한 기대와는 단호히 선을 긋는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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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며, 나아가 여기에도 속 하지 못하고 저기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존재’로서의 불안한 정체감을 굳이 회피하거나 은폐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곤혹스러울지라도 현실 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데에서 부터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수 있 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으로서 힘든 거는 사실 그냥 이도저도 안 되는 저가, 사실 중국 인이지만 그렇게 중국 잘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인이라고 치고 한국 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애매한 상황이, 지금 이 애매함이 저한테는 제일 큰 어려움인데, 극복하려면 더 노력해야죠. 중국을 더, 중국도 한국도 잘 아는 사람이 되려면. 그게 저는 그게 (애매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거 기서부터 출발하는 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요.”

꿈은 가까이 : 작은 것의 소중함과 자기 성찰 그녀에게 계획과 꿈을 물었다. 그녀답게 그것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 았다. 그래서 아마도 머지않아 그 자리에 그녀가 가 있어도 매우 자연스러 울 것 같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웹툰 관련 시장 개발이나 유통 쪽으로 경력을 쌓고 능 력을 키우는 거에요.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그림만 가지고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이 분야에서도 마치 영화감독과도 같 은 종합적인 능력이 필수가 되고 있어요.” “꿈은, 거창하지 않아요. 한국에 잘 적응하고, 직장 망하지 말고. 남편이랑 잘 살고, 돈 잘 벌고, 대출 잘 갚고. 그리고 저를 위해서 좀 더 제 자신의 발전, 제 능력을 발굴해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과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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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걸까? 계속 질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에필로그… 여인은 이주민 리더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출신국에 대한 안타까움 과 책무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례에 해당한 다. 그녀는 객관적이고, 실용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녀는 출신국과 이주국 의 장단점을 매우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녀의 이주 동기는 자신의 ‘전공’ 을 보다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선택 의 주체는 언제나 자신이다. 곧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다. 이런 점에서 여인 은 ‘신세대’ 이주민 리더일 수 있다. 외국인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에 대응 하는 그녀의 자세 역시 남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외국인임을 먼저 밝힘으로 써 관행적인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차별을 선제적으로 방어 한다. 신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전형적인 이주민 리더들과 비슷한 속성을 공유한다. 좌절을 새로운 도전과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는다. 자신 의 재능과 노하우를 동료 이주민들에게 기꺼이 나누어주고자 한다. 정체성 에 대한 고민 속에서도 그녀의 삶을 성공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행 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최고의 동력은, 가족(한국인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 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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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프로젝트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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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에는 귀환 이주노동자 2인 및 도내 체류 이주노동자 5인 총 7인이 선정되었다. 7분의 국적은 모두 상이하다. 그 가운데 두 분은 이주여 성이다. 7분을 선정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프로젝트 홍보 가 이루어졌다. 도내 이주민 지원단체 등에도 이메일과 팩스를 통해 추가적 인 홍보가 진행되었다. 홍보 결과 총 10분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추천받은 분들의 이력서를 접 수받아 심의가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 7분이 결정되었다. 도내체류 이주노동자의 경우 서류 심사와 인터뷰 심사를 병행했다. 귀환 이주노동자의 경우는 비용의 문제로 서류 심사만 진행하였다. 최종적으로 선정된 일곱 분에 대한 인터뷰 및 현지 조사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도내 체류하는 선정자들의 경우 두 번의 심층 인터뷰가 이루어졌으 며, 해외 체류하는 경우는 며칠간에 걸쳐 집중적인 인터뷰와 현지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선정자 인터뷰 및 현지 조사 일정〉 이름

사전인터뷰

심층인터뷰

인터뷰장소

니로샨

7월 14일

11월 24일

선정자 집

아리오나

7월 12일

11월 2일

운영식당

엉묘진

7월 21일

11월 1일

사원/추천센터

사하닷

7월 22일

10월 28일

추천센터/식당

여인

7월 15일

12월 2일

추천센터

비고(지역)

국내

반흥

8월 24일 ~ 27일

집/태권도장/회사

베트남(하노이)

시타람

11월 9일 ~ 13일

집/NGO사무실

네팔(카트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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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결과는 자료집과 동영상으로 제작되었다. 자료집에는 7분의 선정 자 모든 분들의 이야기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동영상에는 예산상의 한계로 국내에 체류하는 분들 가운데 세 분만이 포함되었다. 니로샨, 아리오나, 엉 묘진 세분이다. 동영상은 제작은 이주민 방송(MNTV) 주관으로 2018년 7월에서 9월 사 이에 이루어졌다. 이주민 영상 제작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대 표적인 단체로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 우리가 원하는 영상을 완벽하게 제작해주셨다. 자료집 제작은 인터뷰 결과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인터뷰 및 현지 조사 는 우리 센터의 박선희가 자료집 집필은 오경석이 담당하였다. 계몽적이거 나 전형적인 ‘모델 마이너리티’를 재현하지 않으려, 가능한 한 7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주민 방송을 포함, 이번 프로젝트에 결정적인 이주노동자 리더들을 추 천해 주신 기관과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열정과 도전, 관용과 이타주의를 알게 해준, 7분 의 선정자 여러분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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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Let's get it!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자료집 펴낸이 _ 오경석 만든이 _ 오경석, 박선희 펴낸날 _ 2018. 12 펴낸곳 _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15385)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로 26(초지동 667-2) 4층 26 Hwajeong-ro, Danwon-gu, Ansan-si, Gyeonggi-do, 15385 Korea 전화. 031-492-9347 전송. 031-492-9349 누리집. www.gmhr.or.kr

꾸미고 찍음 _ 동심원(031-852-9333)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2018.

※ 이 책의 독창적인 내용을 허가 없이 마음대로 전재하거나 복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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