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2021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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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박선희·오경석


자료집을 펴내며 「2021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퍼져 있는 이주민에 대한 그릇되고 왜곡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아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유엔은 이주를 전지구적인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요청되는 구체적인 목 표에 포함시킨 바 있습니다.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에 따르면 이주는 송출국과 경유국 그리고 목적국 사회 모두에 기여하는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며, 필수불가결한’ 행위입니다. 국제 사회의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항상적인 인구 및 노동력 부족의 시대에 우리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이주민들의 참여 와 기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자신들이 정착한 지역 사회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 실질적 으로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실증적인 연구들을 통해 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전세계적으로 생산성이 가장 높은 분들입니다. 규모는 세 계인구의 3.4%에 불과하지만 세계총생산(GDP)의 9.4%가 이주노동에 의해 서 만들어집니다. OECD 회원국인 20개 국가의 경우 이주민의 증가가 총요소생산성의 증대 를 가져와 소득 증대에 기여한다는 점이 분석적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 미 국에서 수행된 사례 연구 역시 이주민이 수용된 주의 소득 수준과 노동생산 성 사이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확인시켜 준 바 있습니다. 국내의 연구도 같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경기도내 31개 시군의 경우 외국인 주민의 증가는 1인당 지역내 총생산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반면 외국인주민 의 증가하더라도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지출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이주민들 의 대부분은 젊고 건강한 연령층이어서 복지 수요가 높지 않은 탓입니다. 경제적인 분야와 더불어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이주민은 지역문화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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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고시키고,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글로벌화하며, 지역 간의 적극적인 국 제 교류의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지역 사회에 지대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안산시는 이주민의 규모와 다양성을 인정받아 유럽평의회의 상호문화도시 에 가입한 바 있습니다. 그를 통해 안산시의 도시 브랜드 가치는 국제 수준 으로 제고될 수 있었습니다. 이주민은 이처럼 지역경제 활성화, 지역내 생산 및 소비 증가, 글로벌 문화 교류 및 문화다양성 활성화 등 경제,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지역 사회에 실 제로 매우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주민의 사회적 기여와 역량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주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매우 부정적이고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올해 우리 사무실에서 수행한 「경기도외국인정책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실 태조사」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조사에 참여한 활동 가, 당사자, 지역주민, 공무원 모두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주민에 대한 인식이 매우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 습니다. ‘범죄자 집단’, ‘세금 도둑’, ‘사회복지 먹튀’, ‘한국문화를 타락시키는 자’ 등 근거 없고 악의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이 이주민에 대한 그릇되고 왜곡된 이 미지를 실체화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기획된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의 「2021 이주 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 인식이 얼 마나 부정확하며 나아가 비현실적인가를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언어와 정보 그리고 사회 자본이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낯선 이주 의 공간에서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습 니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다섯 분을 ‘이주민 리더’로 선정 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분의 삶은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또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분들 역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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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인종적 차별과 불평등을 경험해야 만 했습니다. 그분들의 남다름은 고난과 좌절의 상황에서 오히려 새로운 꿈 을 발견하고, 그 꿈을 향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다섯 분의 이주민 리더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가족 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가족과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이 커질수록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자라납니다. 그러한 믿음은 변화를 위한 도전의 밑거름 이 됩니다. 다름에 대한 관용, 넓은 시야, 뛰어난 적응력과 학습력, 전통적이거나 전형적 인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세계관 역시 이분들의 공통점 입니다. 이런 태도로 인해 이주민 리더들에게 어려움은 세상살이의 정상적인 일부로 포용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실패는 존재할 수 없다는 낙관주의 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주민 리더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개인적 성취와 공동체적 성취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관용의 정신은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단호한 개혁의 의지와 공존합니다. 이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존경스럽고 매력적인 삶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저희들에게 는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 부디 우리의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역량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그를 통해 이웃들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일에 즐 겁게 매진하고 있는 수많은 이주민 여러분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이 좀 더 널리 알려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이주민의 지역 사회 기여가 온전 히 평가되고 공유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만들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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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번 자료집은 에세이 형식으로 구성했던 2018년 자료집과 구분됩니다. 이 번 자료집은 많은 분들의 참여와 도움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전조사와 인터뷰는 우리 사무실의 박선희 국장이 맡아주었습니다. MNTV 의 김현숙 피디께서는 적은 예산으로 훌륭한 영상을 제작해주셨습니다. 부천, 김포, 의정부, 안양, 포천 등 경기도 전역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주민 단 체와 커뮤니티에서는 이주민 리더 후보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터뷰 장소도 제공해주셨습니다. 경기도 외국인정책과에서는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과 진행에 전폭적인 지지 와 지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모든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우정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가 장 감사한 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용감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자 신의 삶의 민낯을 드러내어 보여주신 다섯 분의 이주민 리더들이십니다. 다시 한 번 다섯 분의 용기와 정직함에 감사와 경의를 표해 드리고 싶습니 다. 다섯 분의 매력과 열정이, 우리 곁에서 계속해서 발휘될 수 있도록, 앞으 로도 팬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응원드리겠다는 말씀도 꼭 전해드리고 싶습 니다. 2018년 자료집과 마찬가지로 최종자료집의 구성과 집필은 오경석 소장이 맡아 진행하였다는 점도 밝혀둡니다. 자료집을 구성하고 집필하는 과정 내 내, 정말 많이 감동적이었고, 또 많이 행복했었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싶 습니다. 2021. 1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소장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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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자료집을 펴내며………4

chapter 01

제가 누구냐구요? 백가지 일을 해도 나는 그냥 이레샤………12

이레샤,

적응? 정면돌파가 제 스타일………15

자율과 자립의

어쩌다 오게 된 나라, 다시 오기 싫었던 나라 한국………17

공간을 찾아

황무지에서 처음 만난 따뜻한 햇살, 시댁 그리고 사랑………18 문화적 갈등, 편견, 인종주의………20 차별과 맞장뜨기, 내 아이에게는 결코 안돼요………23 변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 톡투미의 탄생………25 성공의 비결, 사람에 대한 애정, 신뢰 그리고 정직함………29 내 나라이자 우리나라, 대한민국………31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따뜻한 한국인, 이것만은 쫌………32 중단될 수 없는 자기 찾기………33

chapter 02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가장 잘 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이에요………38

구릉,

어쩌다 한국, 혹독한 한국………41

내 인생의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모두가 힘들 때도 될 사람은 된다………44

모든 것은

성공 전략? 고난도 즐겁게(고난에 좌절하지 않는다-공통점)………46

한국에서

개인적인 성취와 사회적 기여………48 호락호락하지 않은, 문화적 차이………50 한국,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곳………52 가족, 신용, 관용………54 또 다른 꿈………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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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3

따지안아에서 단아로, 저는 귀환 고려인 1세대………60

따나,

고난 속의 영웅, 고려인………63

100년 만에

고난극복의 만능키, 가족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65

돌아온 고향

변화, 망설이지 않습니다………68 사회를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일………71 가족, 야망, 노력 그리고 정체성………73 100년 후에 돌아온 고향, 나의 현재이자 미래………75 이주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 1위, 대한민국………77

chapter 04

저요?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좋은일주의자’………82

테인민툰,

이병헌의 ‘올인’에 매료된 ‘성실근로자’………85

모두가 회장인

이상적인 나라에서의 어려움, 결국은 가족………87

공동체의 리더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89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게 하는, 리더십………91 모든 것이 고마운 나라, 한국………93 한국, 조금만 덜 고집스러울 수 있다면………95 민주주의의 회복, 끝까지………96

chapter 05

실패를 모르는, 진정한 멀티플레이어………100

자나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 한국………104

스리랑카에서 온

인생이 달라졌어요, 결혼………106

포천의 홍반장

욕을 먹어도 행복해요, 제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거거든요………108 내 고향보다 사랑하는 나라, 한국………111 꿈, 스리랑카 고아들의 부모 되기………113

chapter 06

프로젝트 추진 개요………116

프로젝트 추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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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01 chapter

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노동자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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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제가 누구냐구요? 백 가지 일을 해도 나는 그냥 이레샤

Question

한국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음, 여러 가지, 꽤 많은 일들을 해왔던 것 같아요. 처음 시 작은 아마도 방송 출연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KBS 러브인아시아 라는 프로그램에 장기출연을 했었거든요. 이후에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인 ‘양미경의 우리가 무지개처럼’에도 고정패널로 출연 중에 있어요. 두 번째는 국내외 강의에요. 국내에서는 지방경찰교육원을 비롯해 서 다양한 기관과 학교에서 다문화 혹은 이주민 이해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구요. 일본 오사카 시티 대학교 ‘이주민 컨퍼런스’, 대만 에서 열렸던 ‘아시아 포용 도시 네트워크 워크숍(Asian Inclusive cities Network Workshop)’ 등 해외 행사에서도 여러 차례 강의 한 바 있어요. 세 번째는 공익활동 같은 건데요. 여성가족부 다문화가족정책위 원, KBS방송 시청자 위원, 용산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 서울시 용산구 명예사회복지공무원, 안양시다문화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구요. 마지막은 제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영리 기관’을 운영하는 일 이에요. 2010년 이주여성 자조모임인 ‘톡투미(Talk To Me)’를 설 립해서 현재까지 대표로 일하고 있어요. 톡투미의 주 프로그램으 로는 ‘이모나라 나눔여행’, ‘다밥 협동조합’, ‘달라서 모니카 문화 다양성 교육’ 등이 있는데요, 이들의 총책임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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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Question

간단히 자기소개를 좀 해주세요.

제 이름은 페라라헬레세게 이레샤 딜라니에요. 스리랑카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이구요. 지금은 한국인이에요. 스리랑카 반다 르나야크 마리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유학 가서 MCB대학교 여성복디자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한국과는 1999년에 출장지로 처음 인연을 맺은 후에, 이제는 누구 보다도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 되었구요. 제가 어떤 사람이냐구요? 글쎄요. 재미있는 사람, 호랑이 같은 사 람? 조금 고집이 세기도 하고, 특이한 걸 좋아하고, 도전을 즐기는 그런 사람 같아요. 어디 가서도 무슨 일을 해도 그냥 이레샤로 있을 수 있는 적응력 만렙인 사람! 그냥 동네에선 동네 아줌마처럼, 사무실에 오면 대표 처럼, 그렇게 상황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저인 것 같아요. 딸만 넷인 딸부잣집의 둘째 딸이었는데, 아들역할을 하는 아들 같 은 딸이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굉장히 활동적이었고, 사교적 이었고, 또 자립심이 강했었다고 생각해요. 좋게 보면 도전정신이 강한 건데, 뭐든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대 책 없는 행동파’인 것 같기도 해요. 사우디아라비아 유학도 그랬 고,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것도 가족과 의논 없이 제 스스로 결정 하고 결단한 일이었으니까요. 사실 부모님은 유학 가는 것도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도 다 반대하 셨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한다든지, 성인식 때 선물로 받은 귀금속 등을 처분해서 유학비용을 스스로 마련했구요. 처음에 반대하시던 부모님을 설득하는 방법은 결과로 보여드리는 거에요. 유학 간 학교에서 좋은 성적으로 상을 타고 그러니까, 마 음이 풀리시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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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 정면돌파가 제 스타일

uestion

공부도 결혼도 다 낯선 곳에서 하신 셈이잖아요.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선택 같아요.

제가 뭐든 빨리 배우고, 잘 배우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대 화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하구요. 그래서 그런지 낯선 상황에 뛰어 들거나 거기에 적응하는 것도 제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 던 것 같아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학할 때 아시아 의상 전공이었는데, 언어며 문화에 금방 적응해서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어요. 인도 유학생 들과 사귀면서 인도어도 금방 배울 수 있었구요. 그래서인지 졸업하기 전에 이미 DKNY라는 패션 회사에 취업해 서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구요.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저는 그냥 어렵 다고, 힘들다고 입을 닫고 숨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제가 처음 한 국에 온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정말 외국인들에 대한 인식 이 낮았었거든요. 지금과 달리 외국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때였구요. 사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저를 보고 ‘외국 사람이네’ 하고 손가락 질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저는 외국 사람이기 이전에 안 양 시민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시청엘 찾아가서 복 지팀장님과 대화를 시도했고, 주민자치위원회라는 기구를 알게 되 었어요. 제가 자치위원에 지원을 했더니 다른 위원님들이 반대를 하시더 라구요. 외국인이 자치위원은 무슨 자치위원이냐구요.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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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저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오히려 위원님들이 모두 모여계신 곳에 서 저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아직 한국어가 서툴 땐데도, 그분들 앞에서 제가 누구인 지, 제가 왜 주민자치위원회에 들어가야 하는지 연설을 했지요. 그 러자 그분들이 저를 자치위원으로 받아주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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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오게 된 나라, 다시 오기 싫었던 나라 한국

Question

용 기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한국에 오신 지는 20년이 넘으셨 다고 알고 있는데요, 한국과의 맨 처음 인연은 어떻게 시작이 되신 건가요?

제가 1999년에 한국에 처음 왔어요. 안양 비산동에요. 사 우디 유학 중에 저는 DKNY 스리랑카 사무실에 취업이 되었어요. 그때 제가 맡은 일은 우리 디자인을 갖고 해외 출장을 가서 그 디 자인이 성공적으로 출시될 때 까지 협업 작업을 하는 거였거든요. 제 출장지 중 한 곳이 한국이었던 거예요. 제 자신이 낯선 곳에 엄청 잘 적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국 은 예외였어요. 일단 사람들이 너무 무표정한 게 신기하기도 했지 만 답답하기도 했어요. 웃음이 없고 얼굴이 어둡고 다른 세상 사는 사람들 같다는 느낌. 제 일은 하루에 3,4시간이면 끝나는데, 그다음 시간에는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제가 언어 습득력도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한국어는 잘 배워지지가 않았어요. 그러다보 니 답답함을 넘어 점점 위축되어 갔구요. 게다가 사람들 시선도 안 좋았어요. 사람들이 별로 가까이 다가오 지도 않고, 저도 말 꺼내기도 좀 그렇고. 제가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아주기보다는 피하는 경우도 많았구요. 그러다보니 사업장 분위기도, 늘 화가 나 있거나, 서로 싸우고 있 는 것 같은 분위기, 저랑 그런 것들이 정말 맞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출장만 마무리되면, 다시는 오지 않아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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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황무지에서 처음 만난 따뜻한 햇살 같은 인연, 시댁 그리고 사랑

Question

그 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는데, 어떻게 다시 오시게 된 거에요?

원래는 같은 사무실 동료가 한국 출장을 가야 하는 순서 였어요. 그런데 그 동료가 갑자기 며칠 전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생 겨버렸거든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가 다시 한 번 한국 출장을 오게 된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출장을 가면 회사에서 숙소를 잡아주 는데, 두 번째 출장 때 숙소도 첫 번째 출장 때 숙소와 같은 곳이었 어요. 바로 현재의 제 시어머니댁이었어요. 시댁에서 임대업을 하고 계셨는데, 신기하게도, 몇 달 전에 제가 묵었던 그 방이 공실이었고, 다시 제가 그 방에 입주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반찬을 가지고 제 방에 오셨더라구 요. 저한테 주시면서 제가 한국말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저랑 대화 를 시도하셨어요. 그게 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경험했 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두 번째 출장기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저한 테 자기 아들을 한 번 만나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한국에 친구도 없고, 또 그땐 제가 어리고 활달한 나이였으니까, 그래 그러면 그냥 한 번 만나보자, 하고 남 편을 만났어요.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정말 엄청 조용한 사람이었 어요. 근데 그게 마음에 들더라구요. 왜냐하면 친정어머니가 저한테 늘 해주셨던 이야기가 만약에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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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가 결혼한다면 너는 너랑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 만나야지, 너처 럼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사람 만나면 큰일난다, 이러셨었거든요. 그래서 남편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구요, 그러다 저는 아예 그 남자를 제 남편으로 선택하게 되었어요. 회사는 과감하게 그만 두구요.

Question

사 랑과 결혼도 정말 화끈하게 하셨네요? 그래서 결혼 이후 그 냥 한국에 눌러 앉으신 거예요?

한국에서 먼저 결혼한 후에, 남편이랑 시어머니를 모시고 스리랑카에 가서 스리랑카의 제 가족들 앞에서 결혼식을 한 번 더 치렀어요. 그렇게 해서 저희 부모님께도 추후에 결혼 허락을 받게 된 셈이지요. 그런데 결혼 이후 다시 너무나 힘든 생활이 이어졌어요. 일단 남편 은 다른 도시에 사업장이 있어서 집에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결국 남편 없이 시부모님들하고만 생활을 해야 했는데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한국식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었어요. 큰 애를 낳고 나서도 어디 바깥나들이 한 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 너 무 힘들었구요. 큰 애가 피부가 좀 어두웠는데, 시어머니가 손자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에게 놀림당할 수 있다고, 결사적으로 바깥에 데리 고 나가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집안에만 갇 혀있는 ‘감옥 아닌 감옥’ 같은 생활을 이어가는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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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문화적 갈등, 편견, 인종주의

Question

가 장 안전해야 할 곳이 가장 불편한 곳이 된 셈이네요. 힘드셨 겠어요.

시댁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건, 의식주 이런 걸 공유한다 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데서도 처음에는 문화적 차이, 이런 것 이 굉장히 심했어요. 특히 음식 문화는 적응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어요. 일단 식기가 다르잖아요. 우리는 그냥 손으로 식사를 하는데 한국은 숟가락 젓 가락을 사용하죠. 나같이 손으로 식사하는 문화권 사람들은 손을 정말 깨끗하게 관 리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손으로 밥 먹는다 그러면 일단 되게 신기 하게 보는 거죠. 나는 반대로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 신기하게 보였거든요. 누가 먹었는지도 모를 숟가락을 공유한다는 게 저한 테는 굉장히 겁나고 불편한 일이었어요. 손은, 나만 사용하니까, 나만 잘 관리하고 깨끗하게 사용하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거든요. 그런데 공동으로 사용하는 숟가락은 제가 관리할 수가 없잖아요. 반찬 문화도 굉장히 달랐어요. 스리랑카처럼 더운 나라는 반찬을 보 관한다는 개념이 없어요. 그러니까 식사 때마다 만들어 먹는 거죠. 그런데 시댁에서는 며칠 동안 똑같은 반찬을 먹어요. 먹다가 뚜껑 닫아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똑같은 반찬을 꺼 내 먹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반찬을 만드는 방법도요. 김치나 젓갈, 장아찌 이런 게 스리랑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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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는 없거든요. 지금은 그게 몸에 좋다는 걸 알지만, 고추장이나 된 장 같은 한국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발효식품들 위에 곰팡이가 핀 걸 보고 처음엔 정말 놀랐어요. 게다가 만드는 법을 물어보면 시어머니는 ‘그냥 적당하게’ 하면 돼, ‘간맞게’ 하면 돼, 하시는 데 그게 무얼 뜻하는 건지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구요. 식사 방법도 마찬가지로 어려웠어요. 찌개 같은 걸 같이 떠먹는 것, 이런 게 정말 적응 안 됐었구요. 배가 고파도 내가 먼저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 그건 정말 이해하 기 어려웠어요. 식탁에서 대화할 때도, 어른들만 이야기하고 나머 지는 다 그냥 듣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었구요.

Question

식사 문화 이외에 또 어려우셨던 점은 없으셨어요?

공동체 문화 이런 것도 힘들었어요. 사실 스리랑카에는 그런 문화가 없어요. ‘공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든요. 공중 사 우나나 목욕탕 이런 문화가 없지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걸 즐기잖아요. 처음에 시어머니가 가자고 해 서 간 이후로 저는 단 한 번도 사우나를 가지 않았어요. 너무 불편 하거든요. 가장 힘든 것은 인종차별이에요. 목욕탕에 처음 간 것도, 동네 사 람들이 ‘너 안 씻어서 그렇게 새카마냐’ 같은 말을 하도들 많이 해 서 시어머니랑 갔던 거거든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내 근처에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식당이건, 지하철이건 아무도 곁에 앉지 않더라구요. 제가 한국에 온 지 20여 년이 흘렀고,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한국 사람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여전한 것 같아요. 여전히 저를 만난 사람들 가운데 ‘어디서 왔어요?’ 라고 물어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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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경우가 많아요. 아니면은 ‘너네 나라랑 한국의 차이점을 이야기해 봐’ 라고 하거나요. 동네에서 주차 시비 같은 게 벌어질 때도, 명백히 자신이 잘못했으 면서도 항의하는 제게 ‘너 대한민국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냐’ 이 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구요. ‘어디 외국에서 와서 우리를 무시해’ 이러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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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차별과 맞장뜨기, 내 아이에게는 결코 안돼요

Question

듣 기만 해도 안팎으로 경험하셨을 스트레스와 좌절의 무게가 느껴지는데요, 그 어려움을 이겨내실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 까, 에너지랄까, 그런 것은 무엇이었나요?

아이들이죠. 제가 경험한 한국에서의 외국인 차별, 인종 차별,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그대로 아이들한테까지 이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아이들 세대에서 만큼은 그 문제는 꼭 해결되어야 한다구요. 제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2005년 무 렵부터 지금까지 저는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문제 해결을 위 해서 일해 왔던 것 같아요. 사람은 다 똑같다는 거죠. 사람이 똑 같아지려면 서로 다른 것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되는 것이구요. 그 인정이 없을 때 그건 차별 이거든요. 그것을 위해서 저는 지금까지도 뛰고 있는 것 같아요. 제 큰 애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이었어요. 어느 날 아이가 집에 와서 그러더라구요. 친구들이 ‘너 아프리카 사람이 아니냐’고 그랬 다구요. ‘아리랑 스리랑 스리랑카 아프리카’ 이러면서 놀렸다구요. 어린이 집에서도 우리 애보고 ‘시커먼 아이’가 어쩌구 저쩌구 말들을 많 이 했구요. 그러다보니 우리 애가 자꾸 위축되고 숨으려하는데, 그 모습이 저를 너무나 힘들게 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먼저 숨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시 어머니는 계속해서 애 데리고 나다니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해서는 문제 해결이 될 수가 없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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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그래서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서 어린이집에서건 다른 학부모들 앞에서건, 아이 친구들 앞에서건 자신감 있게 앞장서서 먼저 인사 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사람들도 조금씩 다가오더라구요. 우리 아이도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구요. 그때 알게 되었지요. 내가 먼저 다가가면 되 겠구나. 내 아이도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혼자만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로 만들어주어야겠다 결심했구요. 차별이 내 아이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그것에 대항하는 행동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 각했어요.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멈추지 않 을 것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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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변화,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 톡투미의 탄생

Question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회 활동을 의도하셨던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문제 그리고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 사회 활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셈인 것 이네요?

네, 맞아요. 제가 설립한 ‘톡투미’는 저 자신의 경험과 문 제에서 비롯된 비영리기구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세상을 바꾸려면 내가 있는 위치부터, 나 자신부터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변화를 혼자하는 것이 아니 라, 함께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은 것이구요. 다문화사회를 표방하는 한국 사회에서 제가 경험하고 확인한 명 백한 외국인 차별과 인종차별 문제, 그게 저는 너무 싫었어요.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구요. 톡투미는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변화를 위해 시작되었어 요.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 정을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자, 이런 취 지에서 시작된 것이죠. 제일 중요한 것은 인정인데, 가만히 있는다고 그게 저절로 이루어 지진 않는 것 같아요.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구요. 짧은 시간에 이 사회에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들이 만들어 졌는데요, 그것을 깨뜨리려면 우리 이주민 스스로가 쉬지 않고 나 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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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톡투미’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하시나요?

말씀드린 것처럼 톡투미의 첫 번째 생각은 이주민이 스스 로 할 수 있는 일과 기회를 만들어, 자기를 찾는 일과 직업 두 가지 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자는 거예요. 톡투미 활동은 2010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톡투미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2013년이에요. 출범 당시 목적은 ‘우리가 잘할 수 있 는 것을 하자’로 압축되지요. 모든 이주 여성들이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환경과 기회를 만들고 지원하는 것, 그것이 톡투미의 설립 목적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는 확률도 훨씬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제 믿음이거든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크게 세 가지에요. 우선 ‘다밥’이라는 외국 음식 밀키트 사업이에요. 한국에 여러 밀키트 제품이 있지만 외국 음식만 다루는 밀키트는 없거든요. 올 9월부터 시작했는데, 결과가 좋아요. 두 번째는 ‘모니카랑 놀자’라는 인형 만들기 프로젝트인데요. 이주 민을 인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다양한 외모부터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모니카랑 놀자’는 참여자들이 스스로 다양한 모습의 인형을 만들 어보면서, 문화다양성과 인간의 다양성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프 로젝트에요. 2020년 유네스코로부터 지속가능발전교육 공식프로 젝트로 인증을 받았을 만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모나라’ 라는 여행 프로그램이에요. 이주배경 가정 아이들에게 엄마 나라 여행을 시켜주는 건데요, 엄마들이 직접 여 행 가이드가 되는 형식이에요. 아이들은 한국에서 강요받는 ‘다문화가정’ 혹은 ‘외국인 주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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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라는 부담감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확장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구요. 엄마들은 자녀와의 관계를 돈 독히 하면서 가이드라는 일자리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프로 그램이에요. 현재는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지역만 추진 중인데, 앞으로 점점 늘려갈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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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스 리랑카에도 ‘톡투미’가 있다고 들었어요. 스리랑카 ‘톡투미’ 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네, 스리랑카에는 ‘톡투미 리틀 스타’라고 어린이집이 있 고 일종의 기술학교인 IT센터가 있어요. IT센터에서는 스리랑카 아이들 가운데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지 만 IT쪽으로 관심 있는 아이들을 모집해서 3년 동안 기술을 가르 쳐줘요. 그래서 직업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1년은 자체적으로 교 육하고, 2년은 외부에서 배워,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졸업하는 형 식이에요. 맨 처음에는 제가 노트북 30개 정도를 가지고 가서, 직접 학교를 설립했어요. 지금은 매달 일정액의 운영비를 지원해주고 있구요. 특정한 지역에 단순히 재정 지원만 하는 것 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계속 아이들의 교육과 자립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함께 할 수 있 는 방식을 고민한 끝에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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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 사람에 대한 애정, 신뢰 그리고 정직함

Question

짧 지 않은 기간, 혹독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이주 여성 셀 럽(유명인사)이 되셨고, 독창적인 사회혁신가로서도 명성을 쌓아가고 계십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글쎄요. 나만의 에너지라고 한다면, 친화력이 아닐까 싶 어요. 그냥 친절한 것을 넘어서서 사람에 대한 애정,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것, 그런 게 제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어느 누구하고도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데요. 그런 소 통이 정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지 않고 다 말해요. 애들한테도 그렇고, 사회 활동에서도 그렇고요. 힘들면 힘들어, 어려우면 어려 워. 못하면 못하겠어 하구요. 그렇게 정직하게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함께하는 사람 들을 믿으면서 대화를 하면, 그 과정에서 문제의 답이 찾아졌던 경 우들이 많았어요. 저희 단체 이름이 ‘톡투미’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거든요. ‘톡 투 미. 대화하자’. 대화가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되잖아요. 사무실에서도, 비록 제가 대표라고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것보 다는 조합원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려 고 해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무실 대표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인 것 같기 도 해요. 가장 중요한 거는 모든 일들을 언제나 함께 하려고 노력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작아 보이더라도 제 스스로에 만족하고, 제가 하고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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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들을 긍정하려고도 해요. 사실 사람들이 뭐라 평가하는 것과 관계없이, 저는 제 자신의 이름 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에요. 제가 한국에 처음에 왔을 때 이름이 없었잖아요. 그냥 뭐 스리랑카 사람, 신기한 사람, 시커 먼 사람 이렇게 불렸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이레샤 라고 딱 제 이름을 불러주지요. 아 니면 ‘언니’라고 하거나, 동네에서는 ‘누구누구 엄마’ 이렇게 불러 줄 때, 저를 다시 찾았다는 기분이 들어 너무 좋아요. 저는 여전히 제가 한국 생활 20년밖에 안 된 ‘아이’라고 생각을 해 요.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서류 작업도 너무 어려워요. 그렇지만 ‘아이’니까,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성장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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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이자 우리나라, 대한민국

Question

스리랑카에서 태어나셔서, 한국에서 살아가고 계시잖아요. 스리랑카에서 사신 기간과 한국에서 사신 기간도 거의 비슷 한 것 같기도 하구요. 어떤 기분이 드세요?

한국이 저한테는 이제 두 번째 고향이죠. 첫 번째 고향인 스리랑카에는 나를 낳아준 부모와 형제들이 있구요. 지금 여기 두 번째 고향에는 나의 자식들이 있어요. 제가 ‘우리나라’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물어보곤 해요. ‘우리나라 요? 스리랑카를 말하는 건가요? 한국을 말하는 건가요?’ 그러면 저는 주저 없이 말하죠. ‘우리나라가 우리나라예요, 대한민국이죠. 대한민국은 이제, 내 나라, 우리나라죠.’ 저는 어떤 나라 사람이 되는 게 꼭 그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만 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이제 스리랑카 방문을 한다고 하면, 저는 한국 여권을 가지고 스리랑카 비자를 받고 가거 든요. 그럼 저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대한민국 사람인 거죠. 물론 스리랑카도 여전히 제게 소중한 고향이에요. 스리랑카 역시 ‘우리나라’가 맞기는 해요. 저한테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보다 국 가를 생각할 수 있는 더 넓은 위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제가 계속 스리랑카에서만 살았다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 같은 사회 참여적인 일들, 인권 활동가로서의 삶, 이런 것은 아마 선택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제게 저도 계획하지 않았던 꿈을 꾸게 해 준 나라에요. 정신적으로는 저는 이제 너무 많이 한국 사람이 되어 있 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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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따뜻한 한국인, 이것만은 쫌

Question

말 씀을 들어보면,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한국을 사랑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 혹은 한국인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객 관적인 평가를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국 사람들은 표정이 강해요. 웃음기가 없구, 눈썹도 눈 빛도 강하고 경직되어 보이거든요. 근데 겉은 그렇게 딱딱하고 무서워 보이는데, 그 안에는 굉장히 따 뜻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담겨져 있어요. 상대의 단점을 배려해주 는 모든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점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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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받고 있어요. 동네에서 보면 제가 지금은 싱글맘이잖아요. 친정이 가까운데 있 는 것도 아니구요. 제가 바빠서 아이들 돌볼 틈이 없을 때 동네 언 니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세요. 설거지도 해주고 청소도 해줘요. 가끔씩 내가 출장 갈 때도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하구요. ‘걱정하지 마, 내가 봐줄게’ 그러시 면서요. 또 주말 되면은 반찬을 만들어서 갖다 주세요. ‘너 너무 바쁘니까 이걸로 애들이랑 같이 밥 먹어라’ 이러시면서요. 이런 따뜻한 정 같은 것은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찾아볼 수 없 어요. 거기서는 ‘밥 먹었어요? 뭐 먹었어요?’ 라고 물어보는 것 자 체도 굉장히 무례해서 지탄받는 행동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좀 자기만의 관점에서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좀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함부로 말하는 것 말이죠. 사실 가장 심각한 것은 한국 정책이 바뀌어야 돼요, 다문화 정책이 바뀌어야 돼요. 지금 미신적으로 말하고 있는 거짓말들 다 지우고 실질적으로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법과 제도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해요. 모든 다문화 센터에서는 이주민들이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 는 공간과 직무를 만들 수 있어야 해요. 이런 식으로 정책이 바 뀌지 않는다면, 글로벌 시대, 다문화 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다 따로따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막대한 예산이 쓰이 고 있지만 이주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효과 없는 정책이 왜 계속되어야 할까요? 정책의 효과성을 높이던지, 이주민들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 회를 열어주던지, 변화는 꼭 필요해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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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샤, 자율과 자립의 공간을 찾아

중단될 수 없는 자기 찾기

Question

이 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식상한 질문이긴 한데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 이런 게 있으시다면 소개 부탁드릴 게요.

제가 가진 기본적인 꿈이자 비전은 일관돼요. 더 많은 아 이들이 교육받고 그 아이들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 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죠. 그건 물론 ‘톡투미’의 설립 취지와도 연결되는 계획이자 비전이기 도 해요. 말씀드렸다시피 톡투미는 ‘우리가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취지로 설립된 기관이거든요. 그 취지에 맞게 이주 여성들이 스스로 자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하게 마련하고 싶어요. 그 속에서 일자리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요. 최종적으로는 결혼이주여성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자립, 그 자립을 위한 연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 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자존감을 회 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지하는 것,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일을 하자면 자원도 필요하니까, 사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톡투미’를 브랜드화해서, 체인점을 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 요. 그리고 이모나라 프로젝트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여행사도 창 업할 수 있었으면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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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저도 이제 나이를 먹고, 여전히 큰 힘이 없지만, 끊임없이 노력하 는 일만은 멈추지 않고 싶어요. 부족하더라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자신을 찾는 일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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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02 chapter

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노동자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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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가장 잘 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Question

한국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1992년에 한국에 왔으니, 올해가 만으로 30년이 되는 해 이네요.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맨 처음에는 재봉 공장 시다로 시작해서 여러 사업장에서 외국인 노 동자로 일을 했었구요. IMF 등으로 한국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는 북한산 꼭대기나 한강 변에서 단속에 걸려가면서도 냉음료수나 과일 등 간식을 파는 일 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99년 무렵부터 자영업으로 업종을 변경해서, 서울 아시아마트 라는 식재료상을 차려 성공적으로 운영한 바 있으며, 2007년 수원 에서 네팔인도전문식당 ‘수엠부’를 오픈해서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수엠부는 외국인 점주로서는 처음으로 2015년과 2018년 2회에 걸 쳐 경기도 명품점포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2020년부터는 국제로타리 3750지구 경기다문화로타리클럽의 회 장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2020년 한국이주인권상 이주민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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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Question

한 국에서 생활하신 게 30년이라고 하시니, 정말 대단하시다 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 이주민의 삶이 어려울 수밖에 없 다는 걸 잘 알기에,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하시고 오늘에 이르 시게 된 과정이 정말 궁금하기도 한데요. 일단, 간단히 자기소 개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네팔 포카라에서 태어났구요. 6남매의 장남입니다. 아버지는 교사셨구요. 가정 형편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현재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거주하고 있는데요, 따로 사는 딸 하나와 제가 키우고 있는 초등학생 두 아들이 있습니다. 본업은 수원 매산시장에 위치한 네팔인도음식 전문레스토랑인 수 엠부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다섯 동생들을 모두 뒷바라지 해줄 수 있 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남동생 셋은 현재 모두 한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큰여동생도 한 국에서 5년간 체류한 바 있구요. 저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은 특이한 걸 좋아했었 습니다. 제 삶의 좌우명은 성공적인 삶이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걸 하면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제게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장사였습니다. 잠을 못자 고 가게에서 밤을 새가며 장사를 해도 전혀 피곤하질 않았었으 니까요.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저는 항상 가방에 껌이나 사탕을 가지고 다 니면서 껌 아이들에게 낱개로 팔고는 그랬더랬습니다. 그런 경험 은 제가 한국에 오고 나서 아시아마트라는 가게를 차렸을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창 잘될 때는 주말 매출이 천만 원을 넘을 정도였고, 가게를 차 린 후 불과 4년 만에 지점을 낼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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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저는 네팔 사람이지만, 전형적인 네팔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 대로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네팔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음식하는 것에 대한 금기가 존재 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감히 한국에서 요식업을 선택했거든요. 제 생각에 제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관행이나 문화적 금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 그 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요청되는 필요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뭘 필요로 하냐에 따라, 내가 하는 일이 결정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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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국 혹독한 한국

Question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셨는지요?

한국을 비롯한 외국은 원래 부자들만 갈 수 있는 곳이었 어요. 네팔에는 경제적인 인프라가 부족해서, 어느 정도 수준 이상 의 생활을 이어가려면 해외에 나가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그 비용이 엄청나죠. 제 한국행은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1992년인가 그냥 여행차 홍콩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홍콩에서 머물다가 한국도 한 번 가 보자고 해서 한국으로 이동하게 된 거구요. 서울의 한 호텔에 투숙했는데 그 호텔에 한국인 사업가들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우연히 그분들과 대화를 하다가 취업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에 눌러앉게 된 셈이에요.

Question

요즘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거의 아무런 준비 없이 한국 생 활을 시작하신 셈이네요. 많이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 어떠 셨나요?

그렇죠. 처음에는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 사정도 전혀 모 르는 상태에서, 일단 사업장에 투입되어서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처음 일한 곳이 봉제 공장이었는데요, 하루에 20시간 노동은 기본 이었어요. 아침 8시부터 새벽 2, 3시까지 휴일 없이 일주일 내내 일만 해야 했어요. 일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여가 시간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어요. 그런데 월급은 22만 원 정도로 한국인 노동자의 절반 수준이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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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요. 사장님이 한국인과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요. 좋은 사장님이 아니었어요. 여권도 빼앗고, 폭행과 협박도 잦았으 니까요. 그렇게 2년 6개월 정도를 그 곳에서 일하다가 못 견디고 도망쳐 나왔어요. 인근의 다른 옷 공장에 취업했는데, 월급이 두 배로 뛰었지요. 제 기술과 성실함이 인정받으면서 이후로도 월급은 계속 올랐어 요. 3개월 후 40만 원이던 월급이 50만 원으로 올랐구요, 1년 뒤에 는 70만 원으로 올랐어요. 한국에 입국한 지 5년째인 1997년에 제 월급은 170만 원으로 처음에 비해 무려 8배 이상이 늘어난 액수였 어요. 돈 쓸 시간조차 없었던 장시간 노동이 반복되었지만, 돈을 벌어 고 향에 송금하는 기쁨이 있었구요.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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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모두가 힘들 때도 될 사람은 된다

Question

단 기간에 유능한 봉제 기술자가 되신 셈이네요. 그런데 갑자 기 자영업으로 업종 변경을 하신 이유가 뭐였을까요?

IMF가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이제 한국어랑 한국 문화에 도 적응하고, 기술자도 되고, 월급도 오르고, 해볼 만한 상황이 되 었는데, IMF가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어요.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일도 불규칙해지고 그러다보니까 수입도 들 쑥날쑥 종잡을 수 없게 되었구요. 그런 상황이 길어지자 점점 힘들 어졌구요.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모두가 힘들 때 그런 상황에서도 분명히 되는 일이 있을 거야. 먹 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게 뭘까? 나의 길을 가면서 친구들에게 도 움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고민 끝에 ‘아시아마트’라는 식재료 판매상을 창업하게 되었 어요. 동대문에서 가게 문을 열었구요, 중국, 베트남, 태국, 몽골, 방 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 음식재료와 국제전화카드 등을 판매했는 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어요. 물론 그때도 봉제일을 병행했어요. 창신동에서 창업한 후 봉제일이 있을 때는 봉제일을 하고 없을 때 는 마트일을 보는 식으로 봉제일과 마트일을 병행했어요. 오토바이를 하루에 200km씩은 타고 다녔어요. 성남 모란시장, 경 기도 광주, 거기서 동두천, 포천, 송우리, 미아역까지 몇 군데 들르 면 그 정도 거리가 되거든요. 그렇게 와서 집에 오면 제 얼굴이 새까맣고 손도 새까맣게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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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오토바이를 타다 보니까 엄청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만큼 힘들더라도 보람이 있었어요. 어려웠지만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 했어요. 아시아마트는 흥행을 이어갔고, 한국 사람들과 동업으로 한때는 점 포가 54개까지 확장되었을 정도로 성황리에 운영될 수 있었어요. 아시아마트가 대박이 나자 비슷한 가게들이 여기 저기 생겨났어 요.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 동대문에는 저희 가게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거의 30여 개 가게가 성업 중이거든요. 그래서 2007년쯤 저는 유통업을 접고 요식업으로 전환했어요. 수 원에서 수엠부라는 네팔인도 전문 음식점을 개업했거든요. 수엠부는 한때 7개까지 확장시켰다가 지금은 코로나 등 환경 악화 로 3개로 줄여서 수원, 평택, 경기도 광주 등에서만 운영하고 있어 요. 현재 전체 직원은 한국인 11명과 외국인 12명 이렇게 23명쯤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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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성공 전략? 고난도 즐겁게

Question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이주민으로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도 쉽지 않을 텐데 노동자, 유통업 자 그리고 최근에는 요식업자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계시 잖아요. 그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일단 인생의 대부분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렇게 생각하면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좌절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인생에서 힘든 일이 99%이고 쉬운 일은 1%정도라면 어떻게 살아 야 할까요? 힘든 일을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 겠죠. 그래서 저는 힘든 일이 닥쳤을 때도 가능한 한 즐거운 마음 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음이 즐거워지면, 그때부터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도 있게 되구요. 그리고 새로운 일을 배우거나 공부하는 일에 대한 두 려움도 사라지지요. IMF 때 최악의 상황이었을 때 저는 북한산 정상에 냉음료수를 지 고 올라가 팔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론 나중에 단속에 걸려 모두 압수당했지만요. 마트나 음식점의 경우도 창업 초기 몇 년은 경험 부족으로 그냥 빚 덩어리에요.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죠. 저는 한국 고객 유치를 위해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변 경했어요. 기름기를 최소화하고 강한 향신료도 빼구요. 고객의 수 요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고객들이 잘 먹는 음식은 꼭 맛과 레시피를 확인해 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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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와 홍보도 아주 적극적으로 했어요. 포털과 소셜미디어를 최 대로 활용했어요. 디스카운트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이런 프로그램 도 열심히 사용했구요. 요식업계의 마케팅 기법을 배우고,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네트워킹 을 만들기 위해서 지역 대학에서 개설한 ‘외식산업 프랜차이즈 달 인과정’을 이수하기도 했어요. 6개월간 국내외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외식업체를 방문하고 벤치 마킹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요. 그러자 소문이 나서 창업 3, 4년 만에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어요. 흑자 전환의 포인트는 인도네팔 출신 직원들이 다수 근무하는 대 기업의 게스트하우스에 그분들 전용 출장뷔페로 진출하게 된 거 였어요. 그 이후로 서강대점, 안양점, 서울점, 평택점, 천안점 등으로 매장 을 확장할 수도 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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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2015년에는 외국인 점주로서는 최초로 경기도가 매년 10곳만 지 정하는 ‘전통시장 명품점포’에 선정되기도 했어요. SBS나 MBC 등 공중파 프로그램에 저희 식당이 소개도 많이 되었구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저를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에너지 는 아이들, 가족, 형제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들을 위해서 저는 돈 을 벌어야 하고 그게 행복해요.

개인적인 성취와 사회적 기여

Question

봉 사활동이나 사회 공헌 활동에도 열정적이시라고 들었습니 다.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요?

제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서부터는 사회 공헌 활 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는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국제로타리 3750지구’의 경기다문화로타리클럽 회장직을 맡고 있어요. 회장은 돌아가면서 하는 거예요. 부회장은 제가 몇 년 했는데 회장 은 부담스러워서 안 하고 싶었어요. 사실 외국인이 봉사 활동의 책 임자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다른 회원들과 함께 사업장에서 다친 네팔 노동자를 치료해준다 든지, 네팔 현지에 지진이나 홍수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성금이나 쌀을 모아 보내드린다든지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또 하나 추진하고 있는 것은 네팔음식점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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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하는 일이에요. 점주들이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 이 를테면 비자 문제를 포함한 법률적인 문제들 같은 것들은, 개인이 해결하기 어렵거든요. 그런 문제들을 사단법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 견들이 있어서 추진하게 된 거구요. 현재 200여 명의 회원이 힘을 모아 설립을 추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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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문화적 차이

한 국에서 30년을 사신 거잖아요? 한국 문화 가운데 여전히

Question

적응하기 어렵다, 뭐 그런 게 있으신가요?

이제야 다 적응이 돼서 오히려 네팔 문화가 어려울 때가 있지요. 그치만 초기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있어요. 우선 같이 밥 먹는 문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사실 싫었지요. 반 찬을 같이 놓고 먹는 것도 네팔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데, 비빔밥 같은 것을 만들어서 같은 수저로 다른 사람 입에도 넣어주고 그러 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한 번은 어떤 여자 분이 나한테 밥을 비벼서 먹여주셔서, 나를 좋 아하는구나 오해를 했던 적도 있구요. 그게 아니라 그냥 다들 그렇 게 하는 것뿐이잖아요. 또 하나는 싫다 라고 의사 표현을 할 때 한국 사람들은 머리를 좌 우로 흔들잖아요. 그게 네팔과는 완전 반대였어요. 정말 헷갈렸죠. 그리고 사과하는 문화도 굉장히 달랐어요. 만약에 사업장에서 일 이 제대로 안 된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상사가 왜 일을 제대로 안 했냐구 물을 때, 한국 사람 같으면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그냥 끝 나잖아요. 네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일을 하지 못했던 사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문화가 있거든요. 네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직설적인 어법을 잘 구사하지 않 아요. 우회적으로 말하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말하는 방식에서의 그런 차이도 초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었어요. 말 그대로 문화적 차이는 배우고 적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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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사실 심각한 것은, 문화적 차이 같지만, 외국인 차별 이런 것들 이에요. 외국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약점이 되는 건데요. 그게 정말 제일 어 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도 두 가지 경험이 있는데요. 하나는 사기 피해를 당했던 경험이 에요. 비자 연장을 한다든지 할 때 불가피하게 브로커를 고용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이 빈번하게 사기를 치거든요. 저도 당했어요. 하나는 더 힘든 경험인데요. 제가 봉제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아내 와 사실은 문화차이 그런 것하고 연관된 갈등 탓에 헤어지게 되었 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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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한국,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곳

Question

네 팔에서 사신 기간보다 한국에서 사신 기간이 더 길잖아요. 어떠세요? 두 나라 모두 소중한 곳일 텐데요.

한국은 나한테는 내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곳이에요. 제 가 태어나기는 네팔에서 태어났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곳은 한국이거든요. 저는 이제는 실질적으로 한국인이기도 해요. 저는 한국 국적 취득 자이니까요. 문화도 한국 문화가 아주 편해요. 네팔에 가면 엄청 불편해요. 우선 네팔에는 사우나가 없어요. 네팔에서 감기나 걸리거나 그러 면 한국의 사우나가 너무나 생각나죠. 기후도 그래요. 네팔은 덥고, 대기도 좋지 않아요. 먼지가 많거든 요. 제가 술을 좋아하는데 네팔에는 유흥문화도 없어요. 주점도 별 로 없지만, 그마저도 저녁 8시나 9시 정도 되면 모두 문을 닫으니 까, 아주 불편해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할 때 ‘네팔 사람’이라 고 소개해요. 어쩌면 이것도 제가 한국화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제게 묻는 사람은 ‘한국인’이라는 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저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나라에서 온 외국인일까, 이게 궁금한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냥 저를 ‘네팔 사람’이라고 소개 하는 거예요. 그런 질문에 ‘저는 국적을 취득한 한국 사람이에요’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은 질문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 어쩌면 잘난 체하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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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는 느낌이 있어서요.

Question

한 국에 대해 진솔한 애정을 갖고 계신 게 느껴집니다. 그런 애 정을 바탕으로 충고 같은 것도 한 마디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노력으로 잘 살게 된 나라에요. 아시 아의 여러 나라들이 정말 배울 것이 많은 나라지요. 엄청난 노력으로 늦게 출발했지만, 단기간에 발전해서 선진국이 된 나라가 한국이잖아요. 그 노력이 한국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고, 위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 말 이죠. 그런데 외국인 관련 정책 분야만은 예외인 것 같아요. 말도 안 되 는 상황들이 많거든요. 외국인 관련 법들은 여기 저기 사무실마다 자기 마음대로인 경우 가 많아요. 지역마다 이를테면 평택, 수원, 서울, 광주, 출입국 사무 소의 입장은 다 틀려요. 같은 조건인데도 어느 곳은 비자가 발급되 고, 어느 곳은 불허되기도 해요. 기준이 없어요. 노력으로 발전한 나라 한국에 여전히 외국인의 자리는 없는 것 같 아요. 그냥 데리고 사용하다가, 조금의 잘못이라도 있으면 쫓아내 자, 그 정도인 것 같아 씁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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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가족, 신용, 관용

Question

지 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적지 않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인 성취와 사회적인 기여, 두 가지 모두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가고 계신 것 같아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어떤 마음가짐이랄 까, 그런 것이 있으신가요?

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이 제 모든 것의 원동력이죠. 그 다음은 건강이에요. 건강해야 가족도 보살피고 사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는 신용이에요. 사회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용 이라고 생각해요. 신용은 내 주장만을 내세울 때는 얻어질 수 없어 요. 상대를 존중하는 게 기본이 되어야 하거든요. 저는 직원들에게 혹은 네팔 커뮤니티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일방 적으로 주장하거나 지시하지 않아요. ‘너네가 공부를 많이 했지만 경험은 내가 많이 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 중에도 맞는 부분이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말을 하죠. 심지어 저를 욕하고 비난하는 상대조차도 저는 관용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해요. 저는 사업장에서 네팔 노동자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한국인 관리 자들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말을 해줘요. ‘그 사람들은 고생해서 반장 되고, 총무 되고, 공장장 되고 사장 된 사람들이야. 그렇게 올라오는 과정에서 욕도 엄청 먹으면서 이 자 리에 오른 사람들이지. 마음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자기가 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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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그거 다 보니까 자기도 그렇게 하는 것뿐인 거지. 그러니까 그 걸 이해를 해야 돼.’ 라구요. 사실 저도 일할 때 엄청난 폭언을 듣곤 했어요. ‘야 이 새 끼야 이리와. 야 이 새끼야 밥 먹어. 야 이 새끼야 빨리해.’ 욕이 빠 지면 말이 안 되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냥 다 이해하 고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때 저한테 욕하던 한국인 관리자가 지금은 저한테 형이라고 하 면서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잘 따르는 후배가 되었어요. 그러 구 저한테 이렇게 말해주곤 해요. ‘형, 형은 진짜로 처음부터 일 잘했고, (지금처럼) 잘할 수 있는 사 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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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한국에서

또 다른 꿈

Question

정 말 성공적인 삶을 사신 것 같아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떠세요? 무언가 새로운 기획이 있으신가요?

성공과 관련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해요. 저는 한 번도 제가 성공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제가 잘산다, 잘 살았 다고 못 느껴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해요 제가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저한테는 여전히 앞으로 계 속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요. 한국에서 제가 배울 것들은 여전히 굉장히 많구요. 대신 형식적인 목표 이런 것은 없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 냥 상황에 맞게 제가 큰 생각을 하면 큰 목표로, 작은 생각을 하면 작은 목표로, 계속 해나가는 게 제 방식이에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는 제 성취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제한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예전에 10만 원은 제가 먹고 쓰기도 바쁜 액수였지만 지금은 안 그렇거든요. 지금은 제 수입의 일부를 누군가와 나누어도 충분하 다고 생각하니까요. 사업적으로는 수엠부가 잘 돼서 전국에 지점을 만들고, 네팔 현지 로까지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수입이 늘어 나면 그 돈을 의미 있게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내 고향 네팔과 내 고장 수원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 등을 지원하고 싶어요. 어쨌거나 제가 실질적으로 그 아이들을 도 울 수 있는 건 경제적인 지원이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도 열심히 일 하려고요. 그래야 돕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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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03 chapter

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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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따지안아에서 단아로, 저는 귀환 고려인 1세대

Question

한국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저는 한국에 유학생으로 오게 되었어요. 한국 입국 초기 에는 여러 대학의 한국어 학당에서 한글 공부를 했구요. 어학당 수료 이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노어노문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학위 취득 이후에는 국제 무역 분야에 취업해서 여러 회사에서 경 력을 쌓았구요. 그 중에는 대한항공화물팀에서 일했던 경력도 포 함됩니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 출산 이후에는, 직접 회사를 설립해 경영하고 있습니다. ‘메디타 투어 앤 트레이드’와 ‘(주)바룬임팩스’가 제가 설립한 회사입니다. 전자는 외국인 환자들이 한국의 발전된 의료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회사이구요, 후자의 주 업무는 무역중개업 입니다. 그 외에 사회 공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우선 국내외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활동입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를 비롯한 국내외 이주민 지원 단체들을 통해 사회복지 사각지대의 이민자를 발굴해서 지원하는 일을 꾸 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 정체성과 관련된 일입니다. 저는 고려인 3세거든요. 고려인 사업가 모임인 KBN(Korean Business Network) club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세계한민족 청년지도자 대회에도 참 가한 바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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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고려인 동포들의 국내 정 착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고려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변화와 고려인 3세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역사 및 정체성 교육에도 최 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Question

공 부, 취업, 사업, 사회 공헌 활동, 정말 여러 활동을 하고 계 시네요. 그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궁금 하기도 한데요. 그것과 관련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 릴게요.

저는 고려인 3세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고, 현 재 경기도 김포시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 남편과 아이와 살고 있 는 결혼이민자이기도 하구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연해주에 사시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하시면서 저희 가족은 그때 이후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으셨던 분으로 할아버지의 자녀들인 아빠 의 6형제 모두를 대학 공부까지 시키셨습니다. 제가 5살 때까지 집에서 농사를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5살 때인 가 6살 때 수도인 타슈켄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저는 우즈베키스탄의 명문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타슈켄트에 소 재한 동방대학교(오리엔탈 유니버시티)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습 니다. 20살 때까지 저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었구요. 성장 과정에서 다른 고려인 아이들처럼 저 역시 제 자신을 ‘러시 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러시아 친구들과 같은 말을 쓰고,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절 때 러시아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한복’이라는 ‘특이 한 원피스’를 입는다든지, 러시아 음식(빵) 대신 ‘밥’을 먹는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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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할 때,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한국어를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학원을 다 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고려인의 역사와 저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져서 공부하게 되었구요. 대학 재학 중에 한국인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한국어 공부도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 친구는 지금 제 남편입니다. 남편은 지금껏 제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면서 또 고마 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남편을 통해서 저는 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남편을 따라서 한국에 정착할 수 있는 용기도 가질 수가 있었으니까요. 저는 현재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상태구요. 이름도 따지안아에서 단아로 개명을 했습니다. 현재 아버지는 언니네와 함께 김해에서 거주하고 계시구요, 어머 니는 제 육아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저희 부부랑 함께 지내고 계십 니다. 저의 증조할아버지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정착하셨던 한인 1세대이 셨다면,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정착한 고려인 1세대라고 생각합니 다. 우리 선조들이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저도 이 한국에서 최 선을 다해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이들이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저의 몫이고 이번 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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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의 영웅 고려인

Question

말 씀하신 것처럼 고려인 3세신데요, 고려인은 어떤 분들을 말 하는 건가요?

고려인이란 일제 강점 시대 생존을 위해 연해주로 비자발 적인 이주를 한 조선인들과 그들의 후손을 일컫는 말입니다. 1860년 연해주가 러시아령이 되면서 고려인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해주의 고려인 1세대들은 비교적 손쉬운 상업에 종사하는 중국 인들과는 달리 매우 힘든 농업(콩, 옥수수, 귀리, 보리, 감자 등을 재배)과 어업(연어, 게잡이)에 종사했습니다. 고려인들은 집단 농장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농업의 생산성과 효 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공동체의 역량도 높일 수 있었습니다. 1929년 연해주의 고려인 집단농장인 Polyarnaya Zvezda의 회장 단의 일원이었던 Tsoy Khi Tha씨는 저의 증조할아버지이십니다. 1937년 연해주의 고려인 18만 명은 자신들이 어렵게 개척한 삶의 터전을 등지고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됩니다. 스탈린은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토지 개발을 위해 농업 기술이 뛰 어난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 시킵니다. 계속되는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결속력으로 꿋꿋하게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정부로부터 ‘노 동영웅’ 훈장을 받은 고려인만 227명일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았 습니다. 영웅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소수 민족이 바로 고려인들이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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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려인들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식 교육이었 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려인 2세들은 모두 러시아 교육을 받았습 니다. 안타까운 것은 러시아 학교의 공식 언어가 러시아어였으므로, 고 려인 후손들 대부분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스탈린 사망 이후 고려인 후손들은 공무원, 교사, 의사 등 전문직 과 고위 관리직 에 다수 진출했습니다. 산업, 건설, 교육 분야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고려인들이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영웅 칭호를 받 을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 크게 기여한 것과 같이 이제 저와 같은 귀환 고려인들도 한국 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 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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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극복의 만능키, 가족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

아 무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라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나라

Question

라고는 해도, 처음 입국하셨을 때는, 다른 ‘외국인’들과 다를 바 없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려움들이 있으셨을까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일반적으로 이주민들이 경험하는 문화적인 충격이나 차별 이런 것은 상대적으로 덜 느꼈던 것 같 아요. 제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살았지만 고려인의 음식과 문화가 한국이 랑 많이 비슷했거든요. 물론 사고방식이나 이런 것이 다른 것에 적 응하는 데는 꽤 오래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몇 가지는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들도 있었어요. 한 국인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대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러시아에서는 소리 지른다는 자체가 그 뭐라 할까 모욕적인 언행이어서 금기시 되거든요. 그리고 나이와 직위에 따른 서열 문화라고 할까요, 그런 것은 사회 주의 나라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문화에요. 처음 직장 생활할 때, 권위적인 상사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신적으 로 굉장히 힘들었던 때도 있었어요. 거의 10kg정도 살이 빠졌었으 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시댁에서 인정받는 것도 어려운 과제였던 것 같아 요. 나이 차이도 나고, 제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시댁 에서 반대를 많이 하셨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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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어 린 나이에 홀로 타지에 이주해서 적응한다는 게, 아무리 할 아버지의 나라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충분히 공 감이 갑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맞아요. 쉽진 않았지요. 혼자서 젊은 나이에 왔었으니까 처음 5년 정도는 친구들도 엄마 아빠도 보고 싶었고, 안 맞는 문화 도 있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그러니까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 긴 했어요. 뭐 이제는 저도 한국에서 산 기간이 18년 정도에요. 이젠 제1의 고 향이 한국이 된 셈이거든요. 우즈베키스탄에는 1,2년에 한 번씩 가게 되는데 그리움이나 이런 것은 이제 거의 없어요. 이제 제게 소중한 사람들은 다 여기에 있 거든요. 직장 상사의 스트레스 같은 경우는,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수용하 려고 했어요. 제게 스트레스를 주던 상사분에 대해 동료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이 제게 여러 가지 일을 많이 시키시지만 사실은 제가 여전히 많이 부족해서 오히려 상사분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 고 계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제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요. 정 말 제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상사분도 아시게 되었구, 그때 부터 더욱 저를 믿어주셨던 것 같아요. 저도 한국식의 기업 문화로부터 배운 게 많았구요. 조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 혼자만 작용을 잘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랑 교류를 잘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이제 결혼 14년차에 접어드는데요, 시댁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 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한국 며느리들은 그런 걸 ‘시월드 갑질’이다 하면서 싫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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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요, 저는 매주 시어머니 모시고 파주로 사우나 가고 저녁 먹 고 그런 분위기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시댁에 서도 남편보다 제 편을 더 들어주시게 되었어요. 제가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 적응하고, 제 뜻을 펼치고 하는 데서 마주친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뭐니 뭐니 해도 가족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항상 제가 뭘 원해서 하면 정말 원해서 선택을 하면 허 락을 해주셨어요.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저를 믿고 제 결정을 존중 해주시는 거죠. 그래서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한국인 남편과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도, 또 한국에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도, 정말 조금도 반대를 하 지 않으셨어요. 우리 엄마아빠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언제나 제 판단을 믿으시는 분들이라 반대는 없었어요. 한국에서는 남편의 지지와 지원이 절대적이었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모든 한국 생활은 남편의 도움 덕분에 다 가능해진 것이 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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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변화, 망설이지 않습니다

Question

학 업에도 굉장히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신데요. 학업을 중단 하고 취업을 선택하셨어요. 그렇게 진로 변경을 하시게 된 특 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명문대에 합격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긴 했어요. 특히 언어에는 관심이 많아서요, 대학에서 국제경 제를 전공하면서도 프랑스어나 영어를 함께 공부했었구요. 언어에 대한 제 적성을 살려서 한국 대학원에서는 노어노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건데요. 하다보니까 이게 저한테 안 맞는 거 예요. 제가 공부를 좋아하긴 하는데 제 성격은 외향적이거든요. 그런데 대학원 공부를 하다보니까,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그 생각 을 정리하고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는 것 같더라구요. 매일 비슷한 사람들과 폐쇄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보니까 세상이 점점 좁아지는 기분도 들구요. 그게 저하고는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위에서는 박사과정 을 권유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저는 석사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바로 회사에 취업하는 쪽을 선택했어요.

Question

결 단력이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어떤 회사에 취업을 하신 거 지요?

여러 곳에서 경력을 쌓았는데요. 처음에 입사한 곳은 보 스톡홀딩스라는 자동차 타이어 수출업체였어요. 그곳에서 국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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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대한 기본기를 익힐 수 있었구요. 그다음에는 대한항공화물팀 우즈베키스탄 지역본부에 입사를 했 어요. 2년 정도 근무를 했구요, 대기업의 조직 문화 등을 배울 수 있었지요. 그다음에는 메디컬에비뉴라는 회사에 입사해서 외국인 환자들을 한국 의료시스템에 연결시켜 주는 업무를 전담했어요.

Question

그 렇게 몇 곳의 회사에서 경험을 쌓으신 후에 곧바로 창업을 하시게 된 건가요?

네. 출산 후에 아이 양육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 었는데요. 정규적인 출퇴근은 어려웠기 때문에 비정규적으로 의료 통역과 같은 일들을 하고 있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요, 구사회주의권 사람들의 한 국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욕구는 굉장히 강해요. 한국의 의료비용이 매우 비싸지만, 그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서 비스를 받고 싶어하거든요. 왜냐하면 그쪽의 의료 수준이 매우 낮 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메디컬 투어 앤 트레이드라는 회사를 만들었어요. 제 사업 체를 처음으로 만들게 된 셈이죠. 그걸 만들 때 그런 판단을 했어 요. 이젠 제가 충분히 혼자서도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요. 제가 한국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던 경험, 메디컬에비뉴에서 일했던 경험 그리고 대한항공 등 기업에서 배운 노하우들을 응용하면, 제 스스로가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판단 이 들었거든요. 메디컬 투어 앤 트레이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역량을 인정받은 후 에는 바로 바론 임팩스라는 한국의 의료기기를 우즈베키스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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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하는 회사를 연이어 창업했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사업이자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점 에서 굉장한 자부심과 보람을 느껴요. 소아암을 앓고 있던 우즈베키스탄 어린이 데이비드가 한국 의료 진으로 도움으로 누나로부터 골수 이식을 받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일은, 여전히 제게 큰 감동으로 남아 있어요. 현재 저희 회사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의 거의 모든 종합병 원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우수업체로 선정돼 상도 받았 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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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일

Question

개 인 사업을 하시기만도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데요, 사회 공 헌 활동을 병행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사회 공헌이라고 하셨는데요, 제가 하는 사회 공헌적인 활동은 고려인 관련된 것과 이주민 관련된 것 두 가지로 제한됩니 다. 사실 둘은 연관이 되는 분야이긴 하지요. 저는 고려인이면서 이주민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고려인 3세이지만 ‘내가 한국인이다’라는 뚜렷한 정체성, 그 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신감과 편안함이에요. 제가 한국에서 20여 년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깨달음이거든요.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 덕분에 저는 더욱 편안하게 하고 싶은 일 을 하고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아마 대부분의 고려인 3세들과 비슷하게 저 역시 한국에서 살아보 지 않았다면, 그런 뚜렷한 정체성을 인식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고려인 3세들, 나아가 고려인 사회 전체에 그와 같 은 긍정적인 정체성 회복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제가 고려인 네트워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 런 이유 때문이에요. 고려인 비즈니스 네트워크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키르기르스탄, 중앙아시아의 6개 나라 출신 의 고려인들 사업가들 100여 명이 1년마다 모여 단합과 협력을 모 색하는 자리에요. 저는 회장을 역임했는데요.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사회에 어 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고민을 하고 연계된 활동을 하려고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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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어요. 특히 2년 전에는 한국경제개발원과 협력해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6개 나라의 고려인 사업가 100명을 초청해 3일간 경제포럼을 개 최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이러한 일들이 고려인들의 사업 확장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의 발전에도 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봉사 활동이라면 유엔난민기구, 부천경기글로벌센터 등 국내외 이주민 지원 단체를 통해 취약한 이주민분들을 지원하는 일에 앞장서는 건데요. 저는 그 일 역시, 제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고 려인이자 이주민이라는 점에서, 고려인의 지위 향상은 이주민의 지위 향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과제이기에, 제가 해야 하는 마 땅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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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야망, 노력 그리고 정체성

Question

말 씀해주신 일들 가운데 하나만 하기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 데요.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한결같이 잘 해내실 수 있 는 비결 같은 것이라도 있을까요?

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를 선택하라면 ‘가 족, 야망 그리고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에너지도 그 세 가지 아닐까 싶구 요. 가족의 전폭적이며 전적인 신뢰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구요. 저는 고려인 귀환 1세대로서 분명한 목적의식도 갖고 있어요. 그게 제 야망이랄 수 있는 건데요, 고려인 사회와 한국 사회 모두에 기여 할 수 있는 그런 기회와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게 제 야망인 셈이죠. 노력이라는 부분은 딱 부러지게 설명하긴 어려운데요. 우선 언제 나 지금 이 순간에, 비록 그것이 반복되고 제게 익숙한 상황일지라 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첫 번째라고 생각해요. 제가 한국에서 19년을 살았지만, 지금 막 한국에 온 사람처럼,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비록 성공적은 아닐지라도 제가 한 경험들을 늘 소중하 게 활용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한국에서 공부도 해봤고, 다양한 직장생활도 해봤어요. 그리 고 창업의 경험도 가지고 있지요. 그것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되, 앞 으로도 새로운 경험과 공부의 기회를 넓혀가는 것, 그게 정말 중요 할 것 같아요. 제일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라면 저는 ‘정체성’ 그리고 그에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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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동체에 대한 책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다른 분들이 보실 때에 조금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제 일을 꿋꿋이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고려인 정체성’이라는 말 로 압축할 수 있거든요. 한국인이지만 동시에 고려인으로서 고려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 면서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 제게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거든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은 역설적이지만 우리 사회의 성장과 발 전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감내한다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 움이 될 수 있도록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주 1세대로서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저는 공부와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후 취득한 국가공 인 자격증이 10개가 넘는데요, 그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는 제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할 수 있다 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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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에 돌아온 고향 나의 현재이자 미래

Question

지 금은 한국인이 되셨지만요. 우즈베키스탄은 태어난 곳이고 또 어린 시절 성장한 곳이기도 하잖아요. 두 나라에 대한 느낌 이 어떤신지도 궁금합니다.

제게 한국은 ‘100년 후 돌아온 고향’ 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국인이지만 러시아 사람처럼, 또 우즈베키스탄 사람처럼, 사실 수밖에 없으셨거든요.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저는 그분들의 나라에 돌아온 셈이지요. 그런데 그분들의 나라에 서 저는 ‘이주민’이자, ‘외국인’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서 저는 이 상황을 백년 만에 다시 찾은 고 향과 고향을 찾아온 사람과의 일시적인 어색함 정도로 이해합니다. 한국이 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라면, 이제 우즈베키스탄은 제게 따뜻한 추억이자 추억이 보관된 과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청춘을 보냈던 아주 따뜻하고 추억이 풍부한 곳, 여전히 제게 가장 소중한 우정과 사업적인 파트너십을 제공해주는 곳, 그런 곳 이 우즈베키스탄입니다.

Question

감 동적인 말씀입니다. 그냥 한국에서 나고 자라, 특별한 감흥 없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저희들 에게는요. 한국 사회에 대해서 애정 어린 충고 한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흩어져있는 상황입니다.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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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가 하나이지만 이름들이 다양합니다. 교포, 한인, 고려인, 조선족 등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 사는 것인지 상관없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한테 도와주고 유대인 피만 흘러도 이스라 엘에서 바로 국적을 주는 것입니다. 왜 우리 민족이 이렇습니까? 한국에 돌아와도 아직까지 국적은커 녕 교포 비자도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고려인 장애인들은 일반 병원에서 치료 못 받고 장애인 등급을 받 을 수 없어서 장애인 병원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강해지고 다르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점을 유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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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 1위 대한민국

Question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최종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이주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 1위 국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의 고려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오신 이주민 분들이 불 편함 없이 한국 사회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제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저는 두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인 3세 혹은 4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사업들을 고려인 청소년들을 채용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고려인 청소년들이 자 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 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고려인 인식 개선 교육에 앞으로도 더욱 집중 할 생각입니다. 이 교육을 통해 한국인들의 고려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높아지고 동시에 고려인 아이들의 긍정적인 정체성 의식 도 강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고려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리고 고려 인들이 자신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면, 한국인과 고려인 간에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제거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양 집단 모두의 역량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의 선진화된 의료기술 및 의료기기를 전세계에 알 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치료가 시급한 환자를 병원과 연계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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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단아, 100년 만에 돌아온 고향

있긴 합니다. 한국에 와서 수술하고 완치돼 돌아가는 환자도 꽤 있고, 그분들을 보면 제가 수술해준 것도 아닌데 정말 굉장한 감동과 보람을 느끼 게 됩니다. 그와 관련해서 한국의 의료기술 및 의료 기기에 관심 있는 해외 바이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구요. 그런 각국 바이어들에게 선진적인 한국의 의료 수준과 인프라를 설명해주고 그들이 한국의 의료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통해 한국의 위상이 국제 사회에서 좀 더 높아질 수 있게 하 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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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04 chapter

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노동자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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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저요?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좋은일주의자’

Question

한국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한국에서 제가 해온 일들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저는 2012년 고용허가제 대상자로 한국에 입국한 후,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 간 포천에 있는 A가구라는 가구 회사 한 곳에서 만 일을 했습니다. 성실근로자 재입국 제도에 의해 2018년에 다시 한국에 온 후에도 2년간은 A가구에서만 일을 했구요. 그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장님 동의하에 2020년 B가구 회사 로 이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곳에서 가구 재단사로 일하고 있 구요. 가구회사에서 일하는 것 이외에 2015년부터 포천 송우리에 담마 야나라는 미얀마 사원을 만들었고, 그를 중심으로 미얀마 노동자 커뮤니티를 조직해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미얀마 커뮤니티를 통해 새로 입국하는 미얀마 노동자들의 한국 생활 적응을 돕고 기존의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에서 노 동권 및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경우, 권리 구제를 지원하는 일도 하 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얀만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집중하 고 있습니다. 매주 시위와 모금 운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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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이 주노동자분들이 취업해 계신 사업장의 노동 여건이 일반적 으로 열악한데, 한 곳에서 계속 일을 하셨다는 것이 매우 특별 하게 다가옵니다. 추가적으로 좀 더 구체적인 자기소개를 부 탁드리고 싶습니다.

네, 저는 미안먀의 모아죽 몽유아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 니다. 수도에서 7시간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나이는 30대 중반이 구요. YinMaPin 고등학교를 졸업했구요, Mongywa University에서 철 학을 전공했습니다. 철학은 제가 좋아하는 분야라서 공부했습니 다. 생각을 많이 하고, 또 그 생각에 대해 생각하고 하는 그런 것 들,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유통업 분야였습니다. 4,5년 간 맥주와 옷 등을 판매하는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2년 정도는 택시 운전도 했 습니다. 택시 운전이 수입이 괜찮거든요. 가족은 아버지는 제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을때 돌아가셨구요, 어 머니와 누나가 계십니다. 이분들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 는 제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번 돈들은 대부분은 어머니께 송금해드리는 데 저 는 한 번도 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든 적은 없습니다. 제 인생에 특별한 롤모델이나, 닮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보다는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가자 그런 입장입니다. 나만의 스타일이 분명하지만 고집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좋은 쪽도 있고 안 좋은 쪽도 있는데, 가능하면 좋 게 살아가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틀렸다 싶은 일은 바로 고쳐가면서요.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는 가구 재단일을 하고 있는데요, 가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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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에서는 가장 중요한 파트입니다. 유능하면서도 책임감 있다는 평 가를 받고 있습니다. 일을 마치면 SNS로 동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미얀마 친구들과 정보도 공유하고 그들이 한국에 조금이라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제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장 문제나 한국 생활에 대한 상담도 해줍니다. 저는 사람들과 이렇게 이렇게 의지하고 돕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렇게 하다 보면 좋은 생각들이 모아져서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늘 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면 지역 사회에 동참할 수 있는 일도 찾 기 수월해지고 이주민에 대한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할 거라고 믿 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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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의 ‘올인’에 매료된 ‘성실근로자’

Question

한 국에 E-9 비자로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준비 과정은 어떠셨는지요?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첫 번째였구요. 다른 한 가지는 한류드 라마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드라마 속 한국의 모든 것이 정말 좋았 어요. 특히 이병헌 씨의 ‘올인’이라는 드라마가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 다. 그래서 한국행을 결심하고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야 하니까, 한국어 학원에 등록하고 한 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수강료는 비싼 편이어서 3달에 23만 원인 가 납부했던 것 같습니다. 공부는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7시나 8시까지 이어집니다. 한 국어 시험은 한 번에 통과했습니다. 시험에 통과한 후 5, 6개월 후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구요. 한국 어 학원을 다닌 것 이외에 준비나 입국 과정에서 추가로 지출된 비용은 없었습니다. 현재는 미얀마 정부에서 한국을 비롯한 해외로 출국하는 자국 이 주노동자들에게 귀국보증금 명목으로 150만 원 정도를 받는 것으 로 알고 있습니다. 불법체류 및 미귀환 방지용으로, 적법한 시기에 귀국하면 돌려받 는 돈인데요, 제가 한국에 올 때는 아직 이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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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한 국어를 공부한 기간이 길지 않으신 것 같은데, 한 번에 시 험에 통과하시구,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입국하신 후 에는 줄곧 포천에서만 일하신 것인가요?

2012년에 한국 입국했구요. 한국에 입국하면서 처음 취 업한 곳이 포천 둔내면의 가구회사였습니다. 전체 직원이 10명쯤 되는 회사였는데요, 외국인 직원이 7, 8명이었고 한국인 직원은 2, 3명이었습니다. 가구 공장 일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요.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2년 정도 하면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데요, 저는 처음 배치 받은 그곳에서만 4년 10개월을 근무했습니다. 4년 10개월 근속 후에는 성실근로자로 선정되어서 미얀마로 일시 출국했다가 한국에 재입국해서 다시 포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동료 외국인 한 사람과 사이가 안 좋아져서 사장님 허락 하에 인근의 다른 가구 공장으로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들어 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이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 재 제가 일하는 직장이 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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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나라에서의 어려움 결국은 가족

Question

한 국에 와서 보시니 어떠셨어요? 일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다 처음 해보시는 것들이었잖아요.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 은데요?

미얀마에 있을 때부터 제가 마음속에서 너무나 좋아하고 가보고 싶은 나라여서 그랬는지, 한국에 왔을 때 저는 텔레비전에 서 보던 것보다 모든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였어요. 몇 가지 어려움도 있긴 했어요. 가장 힘든 점은 가족들의 따뜻함이 없다는 것, 그게 처음에는 제일 좀 힘들었어요. 가구일은 해본 적이 없지만 금방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은 아주 잘해요. 공장에서 제일 중요한 일을 맡고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노동 문화라고 할까요,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 이런 것은 적 응하기 어려웠어요. 한국은 정말 세게 일을 하잖아요. 미얀마 사람 들은 그렇게 일하지는 않거든요. 저도 그렇게 일해본 적이 없구요.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은 쌀이었어요. 한국도 쌀이 주식이고 미얀마 도 쌀이 주식이라는 건 같은데, 쌀의 종류가 다르거든요. 한국쌀은 미얀마 쌀과 달리 찐득찐득 찰기가 있는 찹쌀 비슷해요. 그런데 그게 너무나 소화가 안 됐어요. 한 5개월은 계속해서 소화 제를 먹어야만 했을 정도로 고생을 했어요. 밥을 먹는 것 자체가 두려웠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적응이 되어서 소화가 잘 되고 있어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 비슷한 걸 경험한 적도 몇 번 있긴 있어요. 미얀마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데 술 취한 한국인이 시비를 걸어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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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너희들은 그만 가. 이 시간에 외국인이 나돌아다니면 안 돼. 너희 들이 왜 이 시간에 밖에 돌아 다니냐구. 외국인들이 이 시간까지 술 처먹냐. 집에 안 가냐구.’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좀 항의했어요. 몸싸움 같은 것을 한 게 아 니라 그냥 이야기만 했어요. ‘우리가 왜 집에 가야돼요?’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어요.

Question

그런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실 수 있었나요?

돈과 가족이지요. 저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 더라도 참고 이겨낼 수가 있어요. 엄마랑 누나 말고 제게는 소중한 조카들도 있어요. 미얀마에서는 남자 아이가 10살이 되는 해에 상징적으로 불가에 입적하는 그런 행사를 해줘요. 비용은 천차만별이에요. 제 조카에게도 가능하면 크고 멋진 행사를 치러주고 싶어요. 그렇 게 하려면 제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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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회장인, 공동체

Question

돈과 가족을 강조하시는데 사실 개인적인 이익을 넘어서는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해오고 계시잖아요. 미얀마 공동체를 위 한 이타적인 활동들을 꾸준히 또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2015년부터 포천과 인근 지역의 미얀마 동료들과 함께 공동체를 조직해서 운영하고 있어요. 제가 회장이기는 한데요, 회장은 혼자 하는 것은 아니고요. 할 사 람이 없어서 제가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사실은 회원 모두가 회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회원은 모두 모이면 50여 명쯤 되는 것 같아요. 핵심적으로 활동 하는 사람들은 10명쯤 되구요. 공동체 활동은 사무실과 사원 두 공간에서 이루어져요. 공동체 사 무실은 한국인 지인으로부터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저를 친동생처럼 생각해주시는 한국인 형님이 계신데, 그분의 배 려로 싸게 임대할 수 있었어요. 사무실과 함께 담마야나라는 사원도 설립했어요. 사원에는 미얀마 스님도 와 계시구요. 불교도인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에서 사원은 꼭 필요한 공간이에요. 언제나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쉴 수 있는 곳이 사원이거든요. 그래 서 사원을 설립하게 된 거구요. 공동체 회원들은 주말에 모여서 회의도 하고 예불도 드리고 함께 식사도 하구 그래요. 회비는 마음에 맞는 대로 내면 되는데, 대체 로 1만 원에서 3만 원 사이에요. 사정에 따라 회비를 내지 않을 수도 있는데, 공동체 활동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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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회비를 얼마 내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활동에 참여해서 함 께 기도하는 일이니까요. 함께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고마운 일 은 없어요.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요즘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은 미얀마 민주 화 운동을 지원하는 일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시위도 하 고, 모금 운동도 하고 있어요. 시위 때에는 항의의 표시로 미얀마에서 금기시되는 검정색 마스 크를 착용해요. 미얀마 귀국 후의 불이익이 걱정되지만, 지금 미얀 마의 심각한 상황을 그저 보고 있을 수만은 없거든요. 어떻게든 민 주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동체 활동에 열심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그 런데 우리 공동체는 그런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많이 신경쓰지 않 는 편이에요. 사람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과 사정이 있을 수 있기에, 어떤 행동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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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게 하는, 리더십

Question

정 말 겸손하시고 또 리더십이 대단하신 것 같으세요. 미얀마 공동체가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동료들에게 자주 해드리는 조언 같은 게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그것도 좀 들려주셨으면 해요.

제가 제일 많이 강조하는 것은 인내심이에요. 한국 생활 이 힘들더라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한국에 올 때는 모두들 뚜렷한 목표가 있는 거잖아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을 수 있어야 해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고 향에 돌아간다면 더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리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한국의 여러 가지 선 진 기술들과 문화들을 익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도 자주 해 요. 한국어도 열심히 배워둘 필요가 있구요. 우리 미얀마는 이제 산업화 초기인 나라이거든요. 한국의 기술과 문화를 익혀간다면, 미얀마가 산업화 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사 용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특히 자동차 정비 기술 이런 것을 배워서 갈 수 있다면요. 그리고 우리가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지만 그래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곤 해요. 도 움만 받던지, 배우기만 하던지 그런 존재여서는 안 된다구요. 공동체 사무실 임대료도 그래서 건물주는 요청하지 않았지만 우 리 스스로 인상했어요. 원래는 사장님의 배려로 30만 원만 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코로나로 임대업도 불경기고 해서 제가 동료들과 협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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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에 20만 원을 더 내기로 했어요. 사장님은 ‘주지 마’ 하셨지만 ‘우 리 20만 원 더 주자’ 이렇게 된 거죠. 사업장 안에서도 한국인 관리자에 비해 우리 아이디어가 더 좋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그분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지혜롭게 설득 해서 우리 아이디어를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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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고마운 나라, 한국

Question

이 제 얼마 있으면 한국에서 생활하신 지가 거의 10년이 되어 가는 거잖아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데요. 그 시간 동안 한 국에 대한 생각의 변화 같은 게 있었을까요?

제게 한국은 이제 두 번째 세상,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에 요. 한국에 오고 나서 제가 아는 세상은 좀 바뀌었어요. 일하는 방법도 도시에 대한 생각도 한국 생활을 통해 다 달라졌거 든요. 한국은 모든 면에서 미얀마보다 훨씬 발전된 나라에요. 미얀마보다 탁월한 기술력, 미얀마와 비교할 수 없는 택배 문화, 도로 문화 등 미얀마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죠. 그래서 한국에 오기를 많이 잘했다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한국분들 그리고 나라 전체, 한 국 자체가 제겐 너무 고마운 존재에요. 더더군다나 미얀마 민주화 회복 운동에도 한국 전체가 적극적으 로 나서주니까 더욱 더 고마워요.

Question

한국 사람은 어떤 것 같으세요? 많은 분들을 만나보셨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분이라든지, 인상적인 분이었다든지, 그런 분이 계신가요?

저를 가족 같이 생각해 주는 한국인 형이 있어요. 우리 사 원이 입주한 건물의 건물주인이기도 하시죠. 그 형은 제게 필요한 것, 좋은 것, 안 좋은 것, 동생처럼 다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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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준 분이에요. 그 형의 엄마도 저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구요. 제가 빈혈이 있는데요, 그분들 도움이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죽었 을 수도 있어요. 제가 아프다고 연락하니까, 형이 바로 달려와서 차로 바로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그랬어요. 치료받고 나서는 형네 집에서 다음 날까지 쉴 수 있게도 해주었구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미얀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요, 그때 도 형이 고마운 충고를 해주었어요. 집에서 아빠가 허벅지하고 뼈 를 다치셨다는 소식이 왔었거든요. 그때 형이 ‘테인아 그거 심각할 수도 있는 거야. 빨리 집에 가 보는 게 좋겠어’ 라고 알려주었어요. 형 아버지도 같은 부위를 다치셨던 적이 있으셔서 형은 알고 있었대요. 잘못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 심 각한 부상이란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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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금만 덜 고집스러울 수 있다면

Question

한국 사람들이 고쳐야 할 점 같은 것은 없을까요?

한국이 지금도 잘살고 있잖아요. 고쳐야 할 점이라기보다 는 이게 단점이기도 하지만 장점이기도 한 게 한 가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일에 대해서 너무 엄격한 것 있잖아요. 그리고 선배들 말이라면 다 따라야 하는 것, 그런 거는 고쳐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엄격함이나 질서가 한국이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들긴 들어요. 그것하고 연결될 수 있는 건데요. 한국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게 강한 것도 같아요. 자신의 생각에만 꽂혀 있어서 상대방의 의견은 전혀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거는 고쳐야 되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저 같은 이주노동자가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방법 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도 한국인 관리자들은 전혀 들 으려 하지 않아요. 그저 ‘시키는 것만 해’ 라고만 반복하는데 그건 고쳐야 할 것 같아요. 자기만의 고집이 세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좋 은 의견을 수용 못하고, 새로운 문화에도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는 점에서 고쳐야 할 것 같아요.

Question

한국 사람들에게 미얀마를 소개해 준다면, 어떻게 소개하고 싶으세요.

구경할 게 많은 나라에요. 맛있는 것도 많고 좋은데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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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인민툰, 모두가 회장인 공동체의 리더

이 있어요. 양곤하고 바갈, 인레호수.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꼭 가 봐야 해요.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양곤 쉐다곤 파고다는 제일 처음 의 절이에요. 우리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인레호수 쪽에서는 토마 토가 좀 유명하긴 해요.

민주주의의 회복, 끝까지

Question

이제 얼마 있으면 성실근로자 체류 기간도 종료된다고 들었 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네, 맞아요. 내년 4월이에요. 그러면 비자가 만료돼요. 지 금 제 마음은 두 가지에요. 비자 변경이 가능하면 한국에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이 한 가지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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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요. 미얀마 상황이 괜찮다면,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한 가지에요. 한국에 있는 동안은 앞으로 회사에서도 성실하게 근무하고 동료 미얀마 노동자들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힘이 돼주고 싶어 요. 그들에게 마음을 위로하는 말이나 행동을 계속해주고 싶어요. 미얀마에 돌아가게 된다면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즈니스 를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 제일 필 요한 일은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일이에요. 제가 비록 한국에 있지만 미얀마에서 민주주의가 잘될 수 있도록 끝까지 여기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현지에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고, 할 수 있 는 모든 일은 다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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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05 chapter

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노동자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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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실패를 모르는 진정한 멀티플레이어

Question

한국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제가 한국에서 산 지 20년이 되어가는데요. 쉬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부터 소개드리자면 월요일하고 수요일은 서울 여의도에 있는 모 은행에서 스리랑카인 상대의 대출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화요일은 포천에 있는 이주민 지원 단체에서 경기도 통역 서포터 즈로 일하고 있구요. 목요일과 금요일은 의정부에 있는 고용노동 부 산하 산업인력공단으로 출근해, 통역일을 하고 있구요. 토요일과 일요일은 이주민 지원 단체에서 상담 봉사를 하고 있습 니다.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거든요. 통역 활동은 제가 가장 열심히 하는 분야입니다. 경기북부 관내 경 찰서, 의정부지방검찰청, 의정부지방법원, 한국산업인력공단, 의 정부고용지원센터 등에서 꾸준히 통역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두 가지 분야가 더 있는데요. 한 가지는 스리랑카 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일이구요. 다른 한 가지는 봉사 나 재능 기부를 통해 지역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일입니다. 저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포천스리랑카친구들’ 공동체 대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스리랑카 설날 축제를 개최하고 있구요, 비정규적이지만 스 리랑카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스리랑카 명사를 초청한 강연회나 밴드를 초청한 토크콘서트도 열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다문화 축제도 꾸준히 열어왔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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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봉사 활동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들은 2007년 태안 기름 제거 봉 사활동, 2008년, 2013년, 2015년, 2016년 불우이웃돕기 및 연탄 나눔 행사, 2010년 지역 어르신을 위한 효도 행사, 2014년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식 등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한 일 가운데는 2020년 코로나 극복을 위한 생명 나 눔이라는 주제로 ‘포천스리랑카 친구들과 함께하는 헌혈하는 날’ 행사를 진행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2021년에는 지역 어르신 가 정에 난방유를 보급해 드리는 행사를 갖기도 했습니다. 제 고향의 아이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 역시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공동체 회원들과 제가 아는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서 스 리랑카 아이들 50명에게 5년 동안 장학금과 학용품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에 홍수가 났을 때는 성금과 물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 구요.

Question

하 시는 일들을 들어보니, 투잡, 쓰리잡 이런 표현으로는 부족 한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이신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다 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요.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그처럼 많 은 일들을 지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해내고 계실까 궁금해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제 이름은 위신 무디얀셀라게 다야라뜬느(Weesin Mudiyanselage Dayarathne)입니다. 스리랑카 아느라드푸라 시, 갈라웨워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 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형제가 10명이나 되는 대가족입니다. 제가 9남 1녀 중 5째 아들이구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9살 때 그리고 어 머니께서는 제가 17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에 자야와르다나푸라 대학교 싱할라 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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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을 위해 돈을 벌 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형제들을 돌봐줄 부모님이 안 계시니 까 저라도 부모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는 1994년에 왔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포천에 살고 있구요.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한국인 아내와 살고 있습 니다. 결혼한 지는 14년이 되었구요. 돈을 버는 일만큼이나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 각을 갖고 있어서, 법무부법사랑위원회, 포천시 외국인주민 및 다 문화가족 지원협의회 등에서도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저는 길다란 스리랑카 본명 대신 그냥 ‘자나카’라고 통 하는데요. 자나카는 제게 정말 도움을 많이 준 스리랑카 친구의 이 름입니다. 그 친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그리고 한국 사람 이름처럼 세 음절로 되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부르기도 쉽고 기 억하기도 쉬울 것 같아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열심은 일 자 체에 관심을 가지고 정성껏 마무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돈이 목적 이 되어서는 그런 관심이 나올 수가 없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여전히 무언가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끝까지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어떤 일에서든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했기 때문에 실패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그냥 지나치 지를 못했습니다. 제 자신도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부 모 형제, 내 가족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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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금 바쁘고 힘들더라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그들이 힘 을 내서 사는 걸 보면 마음이 뿌듯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솔직하게 사는 것, 거짓말 안 하고 사 는 것 그리고 계획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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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 한국

Question

한 국에 오신 게 2005년이잖아요. 그때는 한국이 지금처럼 외 국인이 많은 나라도 아니었구요. 어떻게 한국을 선택하게 되 셨는지 궁금해요.

맞아요. 제가 한국에 올 때 사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 인지도 잘 몰랐어요. 대학에 입학한 후 공부를 할까 아니면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돈을 버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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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는데 저보다 어린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 거든요. 이제 제가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데요, 스리랑카에서는 제 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다섯 동생들 뒷바라지 하는 것은 어렵거 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하 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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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인생이 달라졌어요 결혼

Question

2 007년에 결혼하셨잖아요.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 요?

네, 맞아요. 제가 2007년에 결혼을 했는데요, 결혼 이후 제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결혼이 제 인생에서 모든 면에서 변화의 계기가 된 일임은 틀림없 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아내는 제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 이고 은인이에요. 아내는 우리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선 생님이었어요. 아내가 너무나 좋았고, 또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열 의도 넘쳐나던 시기여서, 한국말을 배운다는 핑계로 매주 아내에 게 개인교습 아닌 교습을 받았어요. 매주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모르는 단어들을 100개 정도씩 적어 서 선생님이었던 아내에게 물어보며 공부를 했거든요. 처음엔 한 20개 정도만 맞췄던 것 같아요. 아내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정말 잘 가르쳐줬어요. 완벽하 게요. 꼼꼼하고 친절하게요. 그리고 정말 정확해요.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더욱 매력적인 사람인 걸 다시 알게 되었어요. 언제나 깨끗해요. 그리고 아껴쓰구요. 몸 관리도 철저하구요. 뭐든 열심히 해요. 가장 고마운 것은 항상 저를 좋은 사람으로 봐준다는 거예요. 저를 편안하게 해주구요. 제가 마음껏 사회 활동이나 봉사 활동을 할 수 있게 전적으로 저를 믿어줘요. 결혼 후 일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제가 사업과 사회 봉사 활동을 시 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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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업은 음식 재료를 판매하는 것이었어요. 한국에 와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원하는 음식 재료를 판매하고 배달하는 일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굉장히 잘 됐었는데요. 지금은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온라인 등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도 많이 생겨서 잘 안 돼요. 결혼하고 나서 제가 원래 하고 싶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에요.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힘드신 분들,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었거든요. 한국어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나중에 어려운 사람들한테, 한국말 잘 배워서 도와줘야겠다 라는 생각이 있어서였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화장실 갈 때도 한 단어라도 더 외워야 된다는 생각에 벽에다 단 어를 써놓고 단어의 뜻은 스리랑카 말로 써서 공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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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욕을 먹어도 행복해요, 제가 원하는 일을 하는 거거든요

Question

그 토록 하고 싶으셨던 사회 활동을 결혼 이후 원 없이 하게 되 신 셈인데요, 정말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어떤 보람이 있으신 가요?

네 정말 힘들지 않구요. 너무 재미있고 행복해요. 노동자 상담 같은 경우 정말 많은 외국인 친구들이 상담을 하러 오거든요. 열심히 일했는데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경우가 정말 많아요. 그 사람들 이야기 듣고는 직접 사업장에 찾아가 사장님과 담판 짓 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는 회사 관계자들에게 엄청나게 욕도 많 이 먹지요. 그래도 보람이 있어요. 왜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그런 일을 하냐 이런 분도 계신데요. 이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정말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누가 어떤 말을 하고 평가를 해도 마음이 편 해요. 그리고 다시 열심히 하고 싶은 새로운 마음이 들구요. 그 마 음으로 새롭게 노력하게 되는 거구요. 여러 봉사 활동 가운데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은 태안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우리 포천 스리랑카 친구들과 함께 기름 제거 작업에 참여 했던 것이에요. 또 눈물 나는 일은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구요. 한국 사회에 앞으 로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스리랑카 공동체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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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그 밖에 생활형편이 어려운 한국 분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연탄 나 눠드리는 일,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 세 나라 출신 이주노동자 들이 힘을 합해, 지역의 어려운 노인들에게 25만 원씩 지원해드린 일, 겨울을 나실 수 있도록 난방용 연료를 나눠드리는 일 모두가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2021년부터는 주말농장 텃밭을 시작했어요. 제가 포천에서 20년 을 살았지만 직접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건 처음이거든요. 또 다 른 감동이 있더라구요. 상추, 고추, 감자, 깻잎 등. 일단 심을 수 있는 건 다 심었구요. 정성 껏 매일 들여다보며 물도 주고 잡초도 뽑고 살뜰히 살핍니다. 수확 물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드릴 계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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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내 고향보다 사랑하는 나라, 한국

Question

이주민으로, 결혼이민자로 그리고 사회활동가로 한국에서 사신 지 이제 20여 년이 흘렀잖아요. 한국에 대한 감회가 남 다를 것 같아요. 한국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주 아주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해요. 다른 나라에 비해 서,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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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카, 스리랑카에서 온 포천의 홍반장

제가 몇몇 나라 여행을 다녀봤는데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한국 은 멋진 나라에요. 그래서 저는 한국을 제가 태어난 스리랑카보다 도 더욱 사랑해요. 한국은 저 같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었어요. 그리고 제 동생들을 다 뒷바라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수익도 안겨 주었구요. 전세계에 이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열심히 일해서 세계적인 경제 대국을 만든 한국 사람들도 대단하 다고 느껴요. 요즘은 예전처럼 한국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 같 진 않지만요. 노력만으로 오늘의 경제대국을 만든 거잖아요. 제 고향 스리랑카도 정말 아름다운 나라에요. 자유도 많은 나라구 요. 다만 경제적인 것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어요. 돈이 어느 정도 있다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이지만, 한국처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나라는 아니지요. 한국이 너무 좋고, 한국 사람들이 너무 고맙지만,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해외에서 일을 하러 오는 외국 사람 입장, 조금 더 이 해해 준다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해요.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줄 수 있다면 한국은 더 멋진 나라가 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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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꿈 스리랑카 고아들의 부모 되기

Question

앞으로 더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특별한 계획 같은 게 있으시다면 소개 부탁드릴게요.

앞으로 한 10년 동안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 하고 싶어요. 그 후에는 스리랑카로 왔다갔다하면서 사업을 하려고요. 컴퓨터나 핸드폰 분야 무역상을 생각하고 있어요. 스리랑카 사람들은 한국 물건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지금 친 구랑 작게 시작을 해서 하고 있어요. 지금 1년 넘게 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잘 되고 있어요. 내 마지막 희망은 스리랑카에 들어가서 고아원을 만들어서 부모 가 없는 스리랑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는 거예요. 그런 아이들이랑 울고 웃고 함께 먹고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어 주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부터 제가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제 마지막 여생은 그 애들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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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06 chapter

프로젝트 추진 개요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노동자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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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추진 개요

이번 프로젝트는 크게 네 가지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리더 추천 및 선발, 현지 조사와 인터뷰(및 추가 인터뷰), 홍보 영상 제작, 최 종자료집 집필.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센터 홈페이지 및 SNS를 통해 정해진 양 식에 의거해, 이주민 리더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접수된 추천인 모 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 최종적으로 다섯 분을 선정했습니다. 선정된 다섯 분에 대해서는 안산시글로벌다문화센터에서 공로패 수여식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구조화된 질문지에 근거해서 추가적 인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이주민 리더 공모 및 인터뷰 개요> 일자

내용

경로/장소

03월 29일

공모발표 (공모기간: 2021년 3월 29일 ~ 2021년 4월 23일)

홈페이지 페이스북 이메일

04월 07일

박단아 신청(추천인 경기글로벌센터)

메일

04월 20일

구릉굽더마하들 신청 (추천인 경기다문화뉴스)

메일

04월 21일

이레샤 신청(추천인 안양시청)

메일

04월 21일

박단아 사전 인터뷰

김포 박단아 자택

04월 23일

구릉굽더마하들 사전 인터뷰

수엠부 식당(수원)

04월 27일

자나카 사전 인터뷰

포천 청성공원

04월 28일

테인민툰 신청 (추천인 의정부외국인노동자센터)

메일

04월 30일

이레샤 사전 인터뷰

스페이스 살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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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일자

내용

경로/장소

05월 01일

테인민툰 사전 인터뷰

포천 미얀마 사원

05월 03일

선정자 및 선정제외자 개별 통지

05월 18일

리더 선정자 공로패 수여식

06월 11일

테인민툰 추가 인터뷰

06월 14일

구릉굽더마하들 추가 인터뷰

06월 16일

자나카 추가 인터뷰

의정부 km스터디카페

06월 29일

이레샤 추가 인터뷰

스페이스 살림 (서울)

문자 안산글로벌 다문화센터 의정부 km스터디카페 수엠부 식당 (수원)

5월 18일 공로패 수여식 때부터 MNTV에 의한 영상 제작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촬영, 편집 등 영상 제작 기간은 2021년 5월부터 9월까지 총 5개월이 소요됐습니다. <이주민 리더 영상 제작 개요> 연번

제작 내용

1

경기도이주민리더 첫 미팅(5명 시상식)

2

촬영 스케줄 조율

3

영상 기획 및 구성안 작성

4

촬영 장소 섭외 및 실제 촬영 진행

5

스튜디오 인터뷰 구성안 질문지 답변 정리

6

스튜디오 촬영 진행

7

촬영원본 가편집 진행

8

종합편집 진행 - 내레이션, 자막, 음악 등

9

최종 시사

117


06

프로젝트 추진 개요

최종 자료집 집필은, 영상 제작이 완료된 10월부터 2달여간 진행 되었습니다. 다섯 분의 리더들에 대한 사전 및 심층 인터뷰 녹취록 을 바탕으로, 질문과 답변을 재배치, 재구성하고, 각 절에 적절한 사진 자료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최종 자료집이 구성되었습니다.

118



경기도의 새로운 도약 이주민 리더가 시작합니다! 2021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펴낸이 _ 오경석 만든이 _ 오경석, 박선희 펴낸날 _ 2021. 12 펴낸곳 _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15385)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로 26(초지동 667-2) 4층 26 Hwajeong-ro, Danwon-gu, Ansan-si, Gyeonggi-do, 15385 Korea 전화. 031-492-9347 전송. 031-492-9349 누리집. www.gmhr.or.kr 꾸미고 찍음 _ 동심원(031-852-9333)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2021.

※ 이 책의 독창적인 내용을 허가 없이 마음대로 전재하거나 복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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