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2022 이주민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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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이정은·오경석 2022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이정은·오경석 2022

대부분의 사무실이 그렇겠지만, 저희 사무실도 연말은 1년 중 가장 분주 한 시기입니다. 연초에 계획했던 적지 않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평가하고 새 로운 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숨가쁘게 하는 연말의 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고되면서도 가장 보 람있는 가장 난이도가 높으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일을 딱 한 가지만 꼽아 보 라면 저는 단연코 이주민 리더십 최종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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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 보고서를 쓰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만들어 내야 하는 다른 보고서들과 이 보고서는 매우
다른 보고서의 주인공들이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일(사업)’이라면, 이 보고서의
‘사람’
자료집을 펴내며

입니다. 다른 보고서의 핵심이 우리의 주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이 보 고서의 핵심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다른 보고서의 키워드가 ‘정 책’이라면, 이 보고서의 키워드는 ‘삶’입니다. 보고서라는 형식은 같지만, 이 보고서 작업을 하면서 저희들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또 듣습니다. 그의 사랑, 그의 일, 그의 도전, 그의 고민, 그의 눈물, 그가 지나온 길, 그가 가고 싶은 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를 만나게 됩니다. 이 보고서는 올해 우리가 만나게 된 ‘다섯 사람의 그’에 대한 이야기, 그 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주민 리더’라고 부릅니다. 사실 ‘리더’라는 말은 그들의 삶의 웅숭깊고 드라마틱한 감동을 담아내기에 는 너무나 편협한 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누군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기능 에 특화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족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믿음, 변화에 대한 열망, 다름에 대한 관용, 유연하고 자유로운 세계관, 과장 없는 담백한 현실주의, 허세가 아닌 낙관주의, 개인적 성취와 공동체적 성취의 조화, 겸손함과 정직 함, 따뜻함과 단호함, 소통을 즐기는 마음, 꾸준함, 배움과 나눔의 의지’를 모 두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그를 ‘리더’라고 부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올해 우리가 만난 이주민 ‘리더’ 다섯 분은 ‘대단하고 존경스러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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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사람’들에 훨씬 가까운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들,
2022 셨으니까요.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맞습니다. 저는 감히 흉내는 고사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을 살고 계

제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삶과 사람들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주신 다섯 분의 이주민 리더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보고서의 근간이 되는 사전 조사와 인터뷰는 우리 사무실의 이정은 팀

장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정성 있고 열정적으로 디테일한 자료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마련해주신 것에 대해 동료로서, 공동작업자로 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기존의 자료집과 마찬가지로 올해 역시 최종 자료집의 구성과 집필은 오 경석 소장이 맡아 진행하였다는 점도 밝혀둡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지 만, 이 자료집에 어떤 오류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 책임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듣고, 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평 범한 제가 비범한 그들의 삶을 온전히 재현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 다. 그 책임이 무겁고 버거웠지만 그를 넘어설 수 있었을 만큼, 자료집을 구성 하고 집필하는 과정 내내 많이 감동적이었고 또 많이 행복했었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싶습니다.

2022. 1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소장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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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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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을 펴내며

chapter 01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chapter 02

정이 충만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저는요, 태극기 양말을 즐겨 신는 네팔의 열혈 청년 공부부심만은 찐이에요 많이 다르지만 그까이꺼, 적응 만렙 너레스 본캐, 나는 모범 노동자 또 다른 본캐, 나는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회적 지식인 머데시 소사이어티 사우스 코리아, 리더의 자격 내가 누구? 노동하는 지식인, 조국을 생각하는 이주민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 외국 사람 아닌 안산 사람, 너레스 활동가라면, 이 정도쯤이야 저는요, 말보다 발로 뛰는, 착한 왕그나 착한 내 남편, 좋아 가보자 남편의 나라 대한민국! 너무 빨리 온 현타, 매워요 가깝다고요? 사실 아주 멀지만 아이들은 자란다, 나도 자란다 만천하를 정으로 가득 채우자! 마음, 그 마음 가라고 하셔도, 됐다고 하셔도

책임감, 열정 그리고 믿음 괜찮아, 잘했어 중국과 한국, 한국과 중국, 둘 다 내 나라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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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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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3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저요?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인

얌전하고 귀엽다고요? 글쎄요...

송혜교의 ‘풀하우스’의 나라 한국, 콜! 헐, 족발이 안 된다굽쇼

빨리빨리? 나는 더 빨리빨리 힘들지 않아요, 괜찮다니까 힘들다고? 사실 너무 행복해

chapter 04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무다사르

놀러오세요, 그냥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질 때 이제 한국 사람, 어떠세요 저는요, 한국의 수출왕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족이죠 방배동, 이태원, 강남, 나쁠 수가 있겠어요? 그치만 갑은 IC 다 판다? 아니 잘 판다! 그게, 된다고? 돈도 벌고 봉사도 하고, 가능해 리더쉽?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정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 음식 마니아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나는, 단 네 명밖에 없는 스타트, 업! 내, 나라 이젠 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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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chapter 05

바위가 꽃이 되다, 최연화

112 프로젝트 추진 개요 138

네가 제일 예뻐 심양 그리고 시안 교사에서 통역사로 그 봄, 잊을 수 없는 향기 남편, 이런 사랑

열망과 동행

소통, 그리고 소통 다시 소통 똑같은 인간, 맞아?

다들 모여, 교류하고 소통해보자고

아무도 못해, 너희가 주인공이야 우리는 다 같은 지구인

말하기, 듣기, 관심 갖기

00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01 chapter 너레스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Q. 간단히 자기소개를 좀 해주세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저는 네팔에서 온 메타 너레스 쿠마르입니다. 서른 살이고요. 네 팔에서는 컴퓨터(IT, CIT)를 전공했고요, 인도 유학 가서는 펀잡대학 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어요. E-9 노동자로 4년 전에 한국에 입국해 서 지금까지 **테크라는 전기전자 기기 회사 한 곳에 근속하고 있습 니다. 2020년에 안산에 네팔도서관을 만들어 운영자이자 사서로 일 하고 있고요.

Q. 태극기 문양이 그려진 양말을 즐겨 신으시던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하얀색을 좋아하는데 하얀색에 한국 국기가 그려진 양말이 잖아요. 사실 네팔에서는 국기가 그려진 양말 같은 것을 신으면 안 되 거든요. 국기를 모독하는 행위가 돼서요. 그런데 여기는 한국이잖아 요. 자유롭게 국기 디자인된 양말을 신어도 되는 나라예요. 그래서 저 는 제가 한국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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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그런 걸 생각해서 이 양말을 자주 신어요. 저는요, 태극기 양말을 즐겨 신는 네팔의 열혈 청년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01

다음으로 큰 도시 비랏나가르에서 10km 정도

머데시 사마즈라는 곳이에요. 인도 접경지역이에요. 거기서 5km만

가면 인도니까요. 누나랑 형, 저 이렇게 3남매예요. 우리 집은 부잣집은 아니었어요. 가족들은 농장에서 일을 했고요. 저는 공부 욕심이 많았지만, 돈도 벌어야 했어요. 장학금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학 교 다니면서도 계속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01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Q. 가족들도 좀 소개해주세요. 제 고향은
대출까지 받아서 도와주시기도 했고요. 힘들게 공부하면서 사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또 열심 히 일해서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가족과 함께 네팔 힌두교의 대축제인 Chhath 축제를 기념하며
네팔에서 카트만두
떨어진,

공부부심만은 찐이에요

Q. 한국은 어떻게 선택하게 되신 거예요?

공부도 더 하고 돈도 벌고, 그래서 해외 생활은 꼭 하고 싶었어요. 해외 생 활의 일순위는 유럽이나 미국 쪽이었고요.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야만 했어요. 그 쪽으로 가려면 훨씬 큰 비용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고민 중이었는데, 지인 형이 한국을 소개해주었어요. 한국은 시험에 만 합격한다면 거의 비용 없이 갈 수 있다고요. 저는 한국을 선택한 것에 너무 나 만족해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저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돈도 벌었고요. 그리고 제가 원 하던 사회 공헌 활동도 하게 되었으니까요.

Q. 고용허가제 ‘한국어 능력 시험’은 바로 통과하신 거예요? 처음엔 떨어졌어요. 두 번째 통과했고요. 합격하고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8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어요. 그 시간에 저는 컴퓨터 전공자여서 컴퓨터 관 련 사무실에서 일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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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 때 시험 보면 늘 1등을 했었고요. 한국어는 네팔에서 1년 정도 배웠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네팔에서 배운 말들이 거의 사용 안 되어서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었어요. 나중 에 알고 보니까, 네팔에서 한국어 배울 때는 존댓말만 배웠는데 한국 공장에서는 다들 반말을 하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던 거였어요. 한국에 와서는 사회통합 프로그램에 등록해서 한국어를 열심히 익혔 어요. 5단계까지 모두 이수했거든요. 아직도 한국어가 완벽하진 않지 만, 이해하는 것은 이제 거의 가능해요. 친구들 통역해주는 것도 조금 씩 가능하고요. 사회통합 프로그램 5단계 수료를 기념하며

01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01 Q. 한국어 배우는 게 어렵지 않으셨어요? 처음 배우는 언어니까 쉽진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공 부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학교

많이 다르지만 그까이꺼, 적응 만렙 너레스

Q. 한국 생활에 만족하신다고 하셨는데, 언어 이외에 문화적 차이, 이런 것 때문에 힘드신 경험도 분명 있으셨을 것 같아요. 네, 네팔이랑 한국이랑 몇 가지 굉장히 다른 문화가 있어요. 일단 식사 문 화가 너무 달라요. 한국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잖아요. 네팔에서는 그런 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진짜 신기했어요. 그리고 네팔 사람들은 거의 육식을 안 하거든요. 저도 한국에 오기 전에는 거 의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베지테리안이었거든요. 과일 같은 것만 조금씩 먹 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은 ‘고기반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기 를 즐겨 드시잖아요. 그리고 고기도 네팔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기는 염소 고기거든요. 한국 사람 들에게는 좀 생소한 메뉴잖아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제일 어려웠던 것은 ‘빨리빨리’ 문화예요. 네팔에서는 뭐든 천천히 해도 괜찮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언제나 ‘빨리빨리’, 그래서 처음엔 조금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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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먹는 방법, 메뉴 그리고 생활 방식, 이게 다 달랐던 셈이니 말씀하시 는 것보다도 훨씬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적응하셨어요? 한국행이 결정되고 나서부터는 고기 먹는 연습을 했어요. 한국에 가면 고기를 꼭 먹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충고해줬거든요. 스물네 살 때까지는 제가 육식을 안 했었는데 그때부터 고기를 먹게 되었어요. 그리고 한국에 온 지 6개월쯤 지나니까, 나도 한국 사람처럼 빨리빨 리 할 수 있어진 것 같았어요. 저는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에요. 회사 에서 일하는 것도 한두 번 배우면 다 이해할 수 있어서 ‘빨리 빨리’에 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요. 적응을 빨리 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더 열 심히 배우려고 했고요.

Q. 적응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문화가 다르다는 것 이외에 한국 생할에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가장 힘든 점은 가족들하고 떨어져서 사는 거예요. 그치만 네팔에 서 가족들과 함께 보다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어려움도 감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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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Q. 이제 지금 하고 계신 일들에 관해서 좀 여쭤볼게요. 지금 일하고 계신 회사는 어떤 곳이에요?

저는 **테크라는 메탈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회사에서는 모든 공정의 기 계를 다루는 기사로 일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레이저 기계, NCT 기계, 용 접, 드릴, 그라인딩, 샌딩, 제가 다 다루거든요. 각 공정마다 일손이 필요할 때 지원하는 게 제 역할이에요.

Q. 대단하시네요. 네팔에서는 전혀 안 해 본 일이잖아요? 그렇죠. 네팔은 한국처럼 제조업 인프라가 잘 만들어져 있는 나라는 아니 니까요. 큰 기계들을 다룰 일은 거의 없어요.

Q. 보통 때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을 하세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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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일하고 있어요. 일하는 시간이 조 금 많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한국에 무엇보다도 돈 벌러 온 사람들이 잖아요. 조금 힘들어도 열심히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많이 일하면 많 본캐, 나는 모범 노동자

이 벌 수 있는 거니까요,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직장 동료들은 몇 분이나 계세요? 베트남, 중국, 네팔 그리고 한국 사람 모두 25명쯤 돼요. 다 같은 회 사 동료들이어서 서로 다 좋아하고 도와주고 그런 사이예요. 말이나 행 동에서 차별하는 거나 잔소리하는 거, 그런 거는 우리 회사에 없어요. 네팔 사람들하고 중국 사람 한 사람 그리고 부장님 이렇게는 회사 5층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기도 해요. 기숙사를 우리집처럼 깨끗이 관리 하고요. 부장님하고 친하게 잘 지내요.

Q. 그렇게 모든 분들하고 다 잘 지내실 수 있는 비결이 뭐예요?

저는 동료들을 많이 도와주려고 노력해요. 스트레스 받는 친구들 있으면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하고요. 언어 소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 구들 있으면 통역 해주려고 하고요. 나만 잘 되고, 행복하기보다는 내 주변도 같이 잘 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거든요. Q. 이제 E-9으로 한국에 오신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 가시잖아요. 한 곳에서만 일하셨고요. 회사에서도 모범적으로 일하셔서 재입국 특례 외국인노동자로 선정되셨다고 들었어요. 네, 사장님이 약속했어요. 저랑 제 친구랑 둘이 다시 올 수 있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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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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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어요. 사장님이 “다시 와” 이렇게 몇 차례나 말씀하셨으니까, 저는 다시 오 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공장에서 샌딩작업 중인 너레스님 회사에서 함께 화담숲으로 소풍 간 날

Q. 주중에 거의 매일 잔업을 하실 정도로 회사일에 올인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주말에 시간을 내어, 2020년에 네팔 도서관을 만드셨어요. 도서관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우리는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주중에는 한국 말만 해야 하고요. 또 온종일 기계적인 작업에만 매달려야 하고요. 그 래서 주말만이라도 한국에서 생활하는 네팔 친구들이 언어에 대한 스 트레스 없이 책을 읽고, 자유롭게 대화하고,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 킬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좋지만 그런 공간은 다른 지역에 이미 있기도 하고요. 무엇 보다도 저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

기도 했고요. 여기 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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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거든요. 도서관이 우리가 나중에 네팔에 돌 아갔을 때 사업 구상 같은 걸 할 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본캐, 나는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회적 지식인
Q. 카페나 쉼터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굳이 도서관을 만드신 이유가 있을까요? 그것도
온 네팔 친구들 중에도 저처럼 공부하는 거

Q.

생각만 하는 것하고 실제로 실행하는 것도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신 게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처음 시작은 어떻게 하 시게 된 거죠?

처음에는 월세가 싼 작은 데서 시작했어요. 월세 10만 원짜리 작은 공간 에서요. 그 다음에 제가 컴퓨터를 잘 아니까 웹 사이트 만들었고요. 커뮤니티

를 만들어 조금씩 회비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비용을 마련했어요. 그러다가 안산시 지원을 받게 되어서 틀을 잡게 된 거고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기부해 주셔서, 2천 권 정도 책이 있어요.

Q. 너레스 님 이외에 도서관 운영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또 누가 있어요?

30명 정도가 운영에 관여하는 핵심 멤버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리더 고요. 저희 도서관에서 큰 행사할 때는 4백 명가량 모여요. 4백만 원가량 모금 도 되고요. 회원은 꼭 네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인도 사람, 방글라데 시 사람도 있어요. 책도 네팔어 책만이 아니라 힌디어, 영어, 벵골어, 한국어 등 다양하고요.

Q.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에 엄청난 발전을 하셨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그리고 어려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셨을 것 같아요. 도서관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안산시로부터 지원을 받 은 거였어요. 2천만 원 정도 도움을 받아서, 공간을 옮길 수 있었거든요.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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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도서관 안에 간소하지만 힌두 사원도 하나 만들고요. 사원이 만들 어지니까, 도서관이 단순히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 문화공간처럼 확 장되어 사용될 수 있게 되었어요. 힘든 점은 여전히 공간이 열악하다는 거예요. 아직 지하잖아요. 물 이 새기도 하고 책에 곰팡이가 생기기도 해요. 지금 목표는 여기 지 하 도서관의 2년 계약이 끝나면 지상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요. 회원들과 후원금을 내주시는 분들을 통해 이전 비 용도 모으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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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도서관을 운영하시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제예요? 회원들과 같이 춤추고 노래도 하고 식사도 하는 거, 그게 제일 행 복하죠. 기본적으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것 이외에도 재미있 는 거 많아요. 운영진들이 함께 모여 여행을 가기도 휴가를 보내기도 해요. 여의도, 단양 고수동굴, 제주도, 강원도 등 많이 다녔어요. 네팔 에는 바다가 없잖아요? 그래서 바다에 가서 배 타고 이런 것 우리 아주 좋아해요. Q. 도서관에서 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추가적으로 소개해주고 싶은 것 있으세요? 얼마 전에 한국어 시집을 네팔어로 번역 출판하는 일을 했어요.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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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다섯, 여섯 개 언어로 추가로 번역 출판하는 일을 진행 중이고요. 지역 공동 체 라디오 방송에서 ‘나마스테 코리아’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에요. 한 국의 네팔 사람들에게 중요한 뉴스를 소개하고요. 네팔 가족들한테 보내는 메 시지 소개도 하고 그런 프로그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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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용자들은 보통 몇 분이나 되나요? 보통 주말에는 20~30명 내외고요.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하면 100명 이상씩 모이세요. 회원제로 운영을 하는데요, 회원은 현재 3백 명이에요. 1년 회비는 2만 원이고요. 네팔도서관에서 이주노동자 회원들, 지역 주민들과 함께

Q. 도서관 운영의 근간은, 네팔 커뮤니티인 거잖아요. 커뮤니티는 어떻게 시작된 거지요?

커뮤니티 이름은 우리 고향 이름을 따서, ‘머데시 소사이어티 사우 스 코리아’예요. 이 공동체는 6년 전에 만들어졌어요. 제가 한국 오기 전에요. 네팔의 같은 지역 출신들의 자조 모임이라고 보시면 돼요. 네 팔은 여러 민족들이 사는 다민족 국가인데요, 저랑 친구들은 머데시

사마즈라고 인도 쪽 출신들이에요. 저도 처음엔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한국말도 잘 안되고, 병원이라든 지, 교통이라든지 기본적인 생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니까요. 그때 커뮤니티 친구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었어요. 회사 생활의 팁도 알려 주었고요. Q. 지금은 너레스 님이 회장이시잖아요?

네,

회장 된 지 6개월 정도 지 났고요. 현재 전체 회원은 5백 명 정도인데, 안산, 부산 등 지역별로 모 임이 운영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하는데 급한 일이 생겼 머데시 소사이어티 사우스 코리아, 리더의 자격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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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저를 회장으로 선택했어요.

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회의를 통해서 어려움에 처한 회원들 지원 방식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결정해

요. 그 결정에 따라 같이 여행도 가고요. 네팔의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회비는 몇 만 원 정도 소액인데요, 후원금을 모으는 경우 50만 원을 내는 경우 도 있어요.

Q. 같은 지역 출신 자조모임 회장을 한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아요. 리더십이란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냥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할 때 진심으로 응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공동체의 모든 일 그러니까 여행도, 일도, 회의 도,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제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 는 거라고요. 더샤인 축제를 기념하여 이마에 붉은색 티카를 바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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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

노동하는 지식인, 조국을 생각하는 이주민

즐기고 계시다는 게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즐겁게 해낼 수 있는 데에는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 같

은데요, 너레스 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지금 한국에서는 이주 노동자로 일하고 있지만 제 본연의 정 체성은 지식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식인이라는 것,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저는 사회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잖아요. 저는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 도 늘 나 혼자만 행복한 게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들, 가족들, 사회가 같 이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물질적인 풍요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가족들이 그리고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화합하고,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거든요. 공부를 통해 나만이 아니라 우리 고향 그 리고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어요. 제가 한국에 와서 공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 그 꿈을 포기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도서관도 만들고, 커뮤니티 운영도 하고 하는 거예요.

02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01 Q. 정말 한 가지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계시다는 생각이에요. 그것도 단순히 여러 일을 하고 계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각각을

Q. 재입국 특례 외국인노동자로 한국에 다시 오기 위해 내년 봄에 네팔에 잠깐 다녀오셔야 하잖아요. 그때 결혼하신다고 들었어요? 결혼하기로 약속은 했는데, 사실 아직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가 한국에 있고, 그녀는 네팔에 있어서, 지금까지 페이스 북으로만 교제를 했거든요. 가족들도 모두 마음에 들어하시고요. 아내 될 사람은 네팔 저희 가 족들하고도 이미 인사는 다 했어요. 네팔에 가면 바로 결혼할 생각이에요. 제 고향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고요. 지금은 학생이에요. 간호학 이 전공이에요. Q. 정말 롱디(장거리 연애)인 셈이었네요.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무대 위에서 행사 안내를 하고 있는 너레스 님

028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

Q. 지금까지 해 오신 일들도 너무 대단하고 많아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 는다는 게 안 어울리는 질문 같기도 한데요. 혹시 무언가 앞으로 하 시고 싶은 일, 계획, 꿈 이런 게 있나요?

하고 싶은 게 아직도 아주 많아요. 물론 지금은 돈을 버는 것에 집 중해야 하지만요. 저는 고향 마을에도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요. 공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제가 한국에서 배 운 회사 문화 이런 것도 잘 적용해서 네팔에 사업체도 하나 만들고 싶 어요. 고향 친구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요. 이런 일들이 잘 되면, 본격적으로 정치를 해 볼 생각도 있고요. 우선 고향 마을 사람들의 건강 문제 등을 해결해드리고 싶고요. 나아가서 는 네팔의 발전에 기여하는 리더가 되고 싶어요. 그 출발은 고향에 도 서관을 만드는 것, 그리고 주식회사를 차리는 것 두 가지인데, 현재로 서는 그게 저의 가장 큰 꿈이에요. 저는 저뿐만 아니라 한국에 온 네팔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이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네팔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일들에 대 해서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요. 한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네팔 여러 지 역에서 회사를 만들면 네팔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늘어나는 거잖아요.

029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태극기
01
2022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030
한국이 발전해 온 것처럼, 네팔도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해요. 앞으로 한국 생활할 때는 네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하고도 좀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싶어요. 그래서 여러 문화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 는 방법들도 찾고 싶어요. 저는 지금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일 때, 마 음에 큰 감동이 있거든요. Madhesi Society South Korea 멤버들과 함께 네팔로 떠나는 회원 송별식을 하며

외국 사람 아닌 안산 사람, 너레스

Q. 지금까지 한국 생활을 평가하신다면, 어떠세요?

저는 정말 만족해요. 저뿐만 아니라 네팔 사람 대부분도 만족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잖아 요. 한국에서 번 돈으로 네팔에서 기업을 차릴 수도 있고요. 생활 기반 을 마련할 수도 있고요. 한국은 발전된 나라예요. 한국의 선진적인 교통, 도로, 기술, 의료, 환 경 정말 부러워요. 우리 네팔도 이렇게 발전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늘 그런 생각을 해요.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Q. 그래도 무언가 아쉬운 점, 아니면 한국 사회를 향한 바람, 이런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네팔 노동자들이 한국어가 서툴다는 걸 관대하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가끔 한국의 문화나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데, 그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아직 한국 문화에 적응이 안 된 것뿐인 거지요. 그리고 한국 문화에 서툴러도, 같은 지역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생각도

03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01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외국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같은 안산 사람이다, 이 런 식으로요. 도서관에 자원봉사도 많이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 도움이 절실히 필 요할 때가 진짜 많거든요. 네팔 사람들도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저처럼 엑셀 프로그램을 포함해서 컴퓨 터를 잘 다루는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꼭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Q. 너레스 님은 친구들,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돈만 버는 노동자가 아니라 공동체 활동과 사회 공헌에도 전문가인 사회사 업가로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등 도서관에 책을 기증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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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태극기 양말이 어울리는, 네팔의 지식인 청년 노동자, 너레스 01 화랑유원지에서 네팔 친구들과 단풍놀이 후 찍은 단체사진
034 정이 가득한
왕, 02
그나예요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세상의,
chapter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Q. 한국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는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정만천하’라는 이주여성협회를 운영하 는 일이에요. 거기 대표를 맡고 있어요. 경기도 다문화가정 학부모 교 육 네트워크에서도 대표를 맡고 있고요. 그 밖에 재한중국화성예술단 부단장을 맡고 있고요. 수원시와 경기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수원이 주민센터 등 여러 단체에 위원으로 참여도 하고 있어요.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해서인지 제가 많이 부족한데도 상도 많이 주 셨어요. 경기도교육청 교육자원봉사 표창, 수원시 시민공동체구현 공 헌 표창, 경기도 자원봉사 활성화 유공 표창, 수원시의회 자원봉사 공 로 표창 그리고 한국이주인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036
활동가라면, 이 정도쯤이야 02

저는요, 말보다 발로 뛰는, 착한 왕그나

Q.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일이 없는데요. 진짜 대단하십니다. 자기소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중국 단동시에서 온 왕그나라고 합니다. 올해 마흔두 살이고요. 제 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자기소개, 지금의 저를 만든 자기소개는 ‘말보다 발로 뛰는 왕그나’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진짜 그랬던 것 같아요. 말 을 많이 할 필요 없고 말보다는 직접 발로 뛰어서 바로 실천하는 스타일, 그 게 저인 것 같아요. 일단 결정하면 제게 포기란 없어요. 다들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저는 그 일이 의미 있다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런 주의자예요. 그런 마음이 강해서 진짜 미움 받을 때도 많아요.

Q. 추진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왕그나 님을 어떻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뭐 그런 것 있으세요?

“왕그나가 잘했다. 착한 사람인데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자랑스러운 중 국인이다. 한국인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우리 지역 일꾼이다” 그런 소리 듣고 싶어요.

03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Q. 자랄 때는 어떤 아이셨어요?

저는 중국 농촌인 심양에서 나고 자랐어요. 세 자매고요. 저만 아빠를 닮

았고, 언니랑 동생은 엄마하고 똑같이 생겼어요. 어릴 때는 착하다는 말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가정 형편이 유복한 편이 아니 어서 공부를 잘하는 큰 언니는 대학에 갔지만,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을 가는 대신 취업을 해서, 언니 뒷바라지를 했거든요. 살림에 보태시라고 엄 마 아빠에게도 드리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집 둘째는 잘한다.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한다. 착하 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던 것 같아요. 중국 고향이 생각나는 경주에서

038

착한 내 남편, 좋아 가보자 남편의 나라 대한민국!

세상의, 왕, 그나예요

Q. 중국 농촌의 착하고 효심 깊은 아가씨셨는데, 어쩌다가 한국하고 인연이 닿게 되신 거죠?

사실 갑자기 선을 보게 되었어요. 2001년 제가 스무 살 때인데 고 모가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누굴 소개해줄 테니 예쁘게 하고 나오라 시더라고요. 한국분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나갔는데, 오신 분이 지 금 남편이셨어요. 남편은 저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는데 저는 남편 첫 인상이 착해 보 이긴 하는데 그 이상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이 좀 되었어요. 게 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그때만 해도 잘 몰랐고요. 낯선 나라잖아요. 한국말 아예 모르고 문화도 모르고요. 근데 결정적으로 제가 남편이 랑 결혼하면, 엄마 아빠를 초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결심하게 되었어요. 어려운 일이지만 엄마 아빠도 한국에 가실 수 있다면 우리 가정 형편이 지금보다는 좋아질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든 거지요. 제 인생에도 변화가 필요했고요. 그렇게 남편을 21살 때 만나 22살 때, 2002년도에 월드컵 경기 할 때잖아요. 그 봄 3월에 한국에 오게 된 거 예요. 그렇게 한국에 오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어요. 그냥 남편 하나 믿고 제 인생을 다 거는 기분으로 온 거였어요.

정이
02
03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가득한

Q. 한국 사람이랑 결혼해서 한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떠셨나요?

엄마는 저한테 그 말 듣고 깜짝 놀라셨어요. 그리고 반대 엄청 많이 하셨 죠. 그날 밤부터 밤잠을 못 주무시고 맨날 울고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도 옛날 ‘고구려’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북한인데요. 거기 사람들 아신다면서 거기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보통 아니다”, 이렇게 막 겁을 주었 어요. 못 가게 하려고요. 그렇게 집안 사람들 모두 반대하는데, 저는 한 번 결심했기 때문에, ‘아니야. 나는 무조건 가야 돼.’ 하고 마음을 굳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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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온 현타, 매워요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Q.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는 많이 힘드셨지요? 아무 계획도 준비도 없이 상상도 못한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거잖아요. 모든 게 변해버린. 네. 고생 엄청 많았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말도 못 하는데 시 어머니 같이 살아야 되고 한국 문화,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 문화가 아 직도 갈등 많이 생기잖아요. 저는 그때 더욱 힘들었어요. 아기 아플 때 제일 힘들었어요. 말이 안 되니까 혼자 병원에 가야 소용 이 없거든요. 그래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하는데, 시어머니도 바 쁘고 같이 가주는 것 싫어도 하시고요. 거기다 주변에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이런 게 정말 힘들었어요. 남편이 일 나가고 나면 늘 저 혼자만 집 에 있어야 했거든요. 진짜 외롭더라고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 었으니까요.

04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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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다고요?

사실 아주 멀지만...

Q. 언어 이외에, 문화 차이도 왕그나 님을 힘들게 했던 것 같네요. 사실 중국은 정말 가까운 나라고 관광이며 사업 등등의 이유로 자주 왕래하는 곳이어서, 한국인들이 심리적으로 ‘문화 차이’ 이런 것을 심각하게 느끼는 곳은 아니라 는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차이가 심했나요? 한국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한국 문화랑 중국 문화 차 이 나는 게 생각보다 정말 많아요. 특히 출산 및 산후 조리 방식, 이런 건 엄청 달라요. 중국에서는 아기 낳으면 무조건 계란 먹어야 되고 닭고기도 먹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임신했을 때 닭고기 먹으면 아기가 이상해진다고 못 먹게 하시더라고요. 계 란도 마찬가지로 못 먹게 하시고요. 아기를 낳았을 때는 계속 미역국만 먹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미역국이 금방 소화가 되어서 엄청 배고파요.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못 먹게 하니까 스트레스 가 심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빵이라도 사다 달라고 하면 빵도 몸에 안 좋으 니까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 말고도 제가 살면서 경험적으로 확인한 문화 차이들인데요. 아이들을 양 육하는 방식, 풍수며 제사, 이런 게 중국이랑 한국이 다 달라요. 그래서 저도 삐지기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고 화를 낸 적도 정말 많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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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듣기만 해도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그 암담함, 무력감 이런 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정말 힘드셨겠어요. 어떻게 버티신 거예요?

저는 근데 그런 사람이에요. ‘도와 줄 사람이 없네. 그럼 내가 혼자 하면 되지.’ 이런 스타일이거든요. 힘들었지만 누군가 도와주는 것 기 대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아기가 아플 때도 그냥 제가 병원에 혼자서 갔어요. 한국말이 안 되 니까 아기가 기침한다는 건, ‘에헤에헤’ 이렇게 의성어로 표현했고요. 콧물이나 열 이런 것은 바디 랭귀지를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제가 외 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알아들으시고 약 처방을 해주셨고요.

Q. 아기는 결혼하시고 나서 바로 생기신 거예요? 네. 결혼하고 나서 한 달 만에 아기가 생겼어요. 결혼한 해 연말에 첫딸을 낳았고요. 첫딸이 10개월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생겼어요. 그 렇게 연년생 남매를 갖게 되었어요.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Q. 연년생 두 아이를 보시는 게 너무 힘드셨겠지만, 또 아이들이 그 어려운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도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들이 제가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행인 것이 제가 한국에 오고

04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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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나서 3개월 후에 중국에서 엄마도 한국으로 오셨거든요. 제가 한국에서 3개월 동안 엄마 못 봤잖아요. 아기 가졌을 때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시댁에서 중국 음식을 해먹을 수도 없었고요. 그런데 엄마가 오자마 자 중국식으로 갈비를 만들어 주었는데, 익지도 않았는데 막 허겁지겁 먹었 던 생각이 나요. 눈물 줄줄 흘리면서요. 엄마, 아빠 두 분이 한국에 오신 후에는 제가 적응하는 게 훨씬 수월했어요. 힘들 때면, 엄마한테 가서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하면 엄마가 해주시고, 그것 먹고 엄마 보고 하면 스트레스 그냥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Q. 그래도 한국행을 후회는 안 하시죠? 인생을 걸 만했다고 평가하세요?

그럼요. 제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제가 용감하게 한 발 나가는 도전 을 한 건 결과적으로는 정말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조금 힘들 었지만 제가 지금은 예쁜 아이들도 낳아서 잘 키웠고, 또 하고 싶은 일도 마음 껏 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요. 만약에 제가 계속 중국에 있었다면, 제가 지금처럼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살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제 소원대로 저희 가정도 아주 좋아졌어요. 가난에서 벗어나 고향 심 양에 아파트도 장만했고요. 크지는 않지만 이제는 전처럼 하루하루 돈 때문 에 고생 안 하고 살 수 있게 되었거든요. 이렇게 저와 제 가정의 좋은 변화, 그게 다 제 한국행에서 비롯된 거니까요. 제가 인생 최고의 선택을 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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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Q. 지금은 한국어를 진짜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시는데요. 한국어는 어떻게 익히게 되신 거예요? 진짜 초기에는 생존 그러니까 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필사적 으로 익혀야만 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남편이 계속 가르쳐 준 말은, 딱 인사말 정도였어요. “안녕하세요. 안녕히 주 무세요.” 시어머니 모시고 사니까요. 아이 낳고 아기가 아플 때 병원에 혼자 가야되면서부터 아이 건강과 관련된 ‘기침, 가래, 열’ 이런 단어부터 한 마디 한 마디 배웠어만 했어 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 없었고요. 대화를 할 상대 자체가 없었으 니까요. 제일 중요한 한국어 선생님은 TV였어요. TV를 보면 한국어 대사가 밑에 자막으로 나오잖아요. 그때 집중해서 소리와 단어를 연결해서 하나씩 하나씩 외운 거예요. 아마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02
046 ‘정만천하’ 회원들과 회의 하면서

아이들은 자란다, 나도 자란다

Q.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셨잖아요. 한국어나 한국 문화에 제대로 적응 하거나, 배울 기회도 없으신 채로요. 어떠셨어요? 아이들 키우시면 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지금 큰 딸은 패션 디자인 분야 유학을 준비하고 있고요. 얼마 전 엔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저한테 제주도 여행까지 보내줬어요. 아들 은 뮤지컬 쪽에서 일하고 있고요. 다들 정말 너무 잘 커 줘서 항상 고 마운 마음이에요. 그런데 자라는 과정에서는 사실 그렇지가 못했어요. 저희 아이들이 자랄 때, 두 가지 언어를 들으면서 자라니까 사실 두 언어 모두 빠른 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집에서 아빠랑 할머니하고는 한국말로 대화하고, 엄마랑 외할머니하고는 중국어로 대화하고 이런 식이었으 니까요. 그런데 큰딸 유치원 때 거기 선생님이 애가 말도 잘 안 하고 잘 먹지도 않는다며 너무 몰아붙이고 애를 스트레스 받게 했어요. 그러니까 애 는 자꾸 토하고요.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제가 유치원을 찾아 갔거든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하신다는 말씀이 “엄마가 빨리 한국말 배워야지 애가 따라갈 거 아니냐” 라고 다그치면서 애를 계속 보내라는 거예요.

04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정이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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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왕, 그나예요

제가 너무 기가 막혀서 바로 유치원을 끊었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아이들의 정서를 존중하는 다른 유치원으로 옮 겼어요. 그랬더니 거기서는 애가 완전 바뀌더라고요. 한국어랑 중국어, 언어 습득도 빨라지고요. 거기 선생님들께서도 우리 애들이 너무 똑똑하다고, 그 리고 잘 생겼다고 칭찬 많이 해주셨고요. 그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한국어랑, 중국어 두 나라 말은 아주 잘하 는 수준이에요. Q. 진짜 좋은 선생님을 만나신 거네요. 그럼 유치원 때 이후로는 별 문제없이 주욱 잘 커 준 거예요?

애들은 잘 커 줬지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 또 좀 사건이 있었어요. 아이들

이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친구들이 “너네 엄마 중국 사람이야” 이렇게 놀리

고 해서 아이들이 몇 번인가 충격 받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제 식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했어요. 바로 학교에 찾아가서 담임 선생

님께 “제 아이들이 엄마가 중국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다른 친구들로부터 너 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제가 아이들에게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그 런 수업 한 번 해 주면 아이들 오해도 풀릴 것 같으니, 기회를 한 번 달라” 이 렇게 제안드렸고요. 선생님이 기회를 주셔서 학교에 가서 강의를 했어요. 그를 계기로 방송 출연 도 하게 되었고요. 그랬더니 이번엔 아이들 학교 친구들이 “너네 엄마가 내 엄 마였으면 좋겠다” 그러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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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이제 성인이 된 두 자녀와 함께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02

Q.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을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는데, 그 중심은 ‘정만천하’잖아요. ‘정만천하’가 어떤 단체인지, 조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중국어로는 발음도 그렇고 뜻도 그렇고 정말 아름다운 단어예요. 간 단히 말하면 ‘만천하를 정으로 가득 채우자’ 이런 뜻이거든요. 취지는 만천하 에 우리의 정, 마음, 사랑, 나눠주자, 이런 것이고요. 정이 가득한 천하, 어디 가나 정이 있는 세상, 누구나 가족처럼 따뜻하게 환대받을 수 있는 세상, 이게 ‘정만천하’가 지향하는 사회예요. 저를 비롯한 ‘정만천하’ 회원들은 그런 세상 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보자는 데에 뜻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고요. Q. 그렇게 설명해주시니까 진짜 매력적인 단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작하게 된 계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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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있었을까요? 직접적이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앞서 말씀 드린 제 아이들이 학교에서 단지 이주 배경 가정이라는 것으로 놀림 받았던 경험, 그리고 제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그런 부당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바로 잡았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이주민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를 제가 먼저 몸소 만천하를 정으로 가득 채우자!

세상의, 왕, 그나예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함께 나누고 교류 하는 ‘정이 가득한 세상’을 제안하고 먼저 추진할 수 있는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다. 이런 취지로 ‘정만천하’를 시작하셨다는 것 같아요. 구체적인 활동의 목표도 그런 것이겠죠?

네, 맞아요.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받은 것만큼, 이제는 우리도 보답하 고 환원하는 역할을 해보자. 그런 목적이에요. 그래서 핵심이 봉사인 거고 요. 또 하나는 우리의 미래 세대, 이주 배경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부모의 출신국과 그들이 나고 자란 한국 사회, 두 사회 모두에서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 이런 것이고요. 아이들은 두 언어를 모두 할 수 있으 니까, 양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거든요. ‘정만천하’ 회원 가족들과 함께 2019 경기 꿈의 학교 일일 캠프 기념 사진

05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실천해야만 아이들도 자신감 있고 당당한 존재로 변화할 수 있다는 신 념, 그런 데서 ‘정만천하’는 출발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Q. 이주민이라고 해서 한국 사회가 우려하고 설정해놓은 것처럼 단순히 수동적이고 수혜적인
정이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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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그 마음

Q. 2002년에 한국에 오셔서,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정만천하’ 활동을 하신 거니 까요, 10년의 한국 사회 적응기, 그리고 다음 10년의 한국 사회 환원기, 뭐 이 렇게 정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단체 운영의 철학 같은 게 있으신가요? 마음이죠. 저는 제일 중요한 게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목적을 성취 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정만천하’ 자체가 하나의 목적일 수 있는. 그러 려면 그냥 이곳에 와서 일하고, 대화하고, 음식을 나누고, 행사를 추진하고 하는 행위 자체가 즐거울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 모든 일이 즐겁기도 하고 편하 기도 해야 하는 거지요. 저는 지금까지 그 마음을 제일 강조해왔던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Q. 말씀을 들어보니, 결속력이 대단한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함께하시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맞아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에 안 맞는 분들도 계실 수밖에 없어요. 저는 ‘우리 스스로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 이게 우리 ‘정만천하’의 가장 중 요한 존재 이유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게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그런데 거 기에 동의하실 수 없는 분들도 당연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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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분들은 결국 떠나시고요. 지금은 주말이든 평일이든 언제든 지 부르면 아무 말 없이 그냥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함께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 분들이 계셔서 ‘정만천하’가 유지 될 수 있는 거거든요. 항상 미안하고 또 고맙고 그런 마음이에요. 이 분들이 안 계시면 저희 단체도 존재할 수 없겠죠.

Q. 초기에 회원들은 어떻게 모으신 거예요?

그냥 전화한 거였어요. 그때는 제가 이제 한국 문화에도 조금은 적 응하고, 한국어도 어느 정도 될 때였거든요. 그래서 동사무소에서 다 문화 관련 프로그램 같은 게 있으면, 그냥 전화를 했어요. 이런 저런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참여하라고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연결을 하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는 제가 통역도 해드리고 병원도 동행해드리고 이런 식으로 활동을 했더니, 어느 틈에 제 전화번호가 여러 사람들에게 공유되게 되었고요. 그러다가 카톡 단체방이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봉사 활동이 시작된 것 같아요. 봉사 활동을 매개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점점 커졌 고요. Q. 협회라는 형식의 공식적인 단체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그냥 동아리 활동 수준이었어요. 2013년 협회로 바뀐 거 죠. 협회가 되기 전에 우리 활동의 두 축은 봉사와 공연이었어요. 봉사

세상의, 왕, 그나예요

05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정이 가득한
02

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복지 분야에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한국 사회에 환원할 수 있어야겠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시작된

거였고요. 출발은 독거노인 반찬 봉사였어요. 공연은 필요로 하는 분들이나 단체를 방문해 중국 전통 무용 공연을 해드리 는 것이었고요. 우리도 사실 무용 전공자나 이런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연할 때마다 영상 보고 배운 다음에, 동료들에게 가르쳐 주고, 그런 식으로 공연을 했었어요. Q. 봉사나 공연, 모두 영리적인 활동은 아닌데요. 비영리 활동이라고 해서 비용 이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정말 초기에는 제가 주말마다 벼룩시장에 참여했어요. 제 물건들 판매 대 금을 단체 통장에 넣고 공금으로 사용했어요. 단체의 틀이 조금 잡히고 나서

부터는 연회비를 받았어요. 연회비는 1년에 5만 원이에요. 지금 정회원은 60 명 정도 돼요. 비회원 단체방에는 500명 정도가 들어와 계시고요. 연회비는 공모 사업 신청 시 자부담용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공익적이지만 조금이라도 재정에 보탬이 되어 보고자 수익 사업도 하고 있어 요. 이주여성과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는 주말 강좌를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 거든요. 중국어, 한국어, 댄스, 서예, 현재 운영 중인 강좌는 이렇게 네 가지 예요. 중국어반에는 아이들이 스무 명이 넘어요. 6살부터 11살까지. 서예반은 7명 쯤 있고요. 회원일 경우는 할인을 해주고요, 비회원일 경우는 정액제로 운영 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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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정만천하’ 회원 가족들과 환경미화 자원활동 후에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02

가라고 하셔도, 됐다고 하셔도

Q.

봉사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봉사자 입장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 봉사를 받으시는 분들 입장에서도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어떠세요?

맞아요. 일단 우리 입장에서는 왜 우리 활동에 대해 아무 대가를 지불하 지 않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안타깝지만 그런 분들 대부분은 ‘정 만천하’를 떠나시고요. 저희가 반찬 봉사나 경로당 봉사를 하려고 할 경우, 어르신들께서 “너희들 뭐 받으려고 그런 거 아냐, 필요 없어, 그냥 가” 이러시는 경우도 없지 않고요. 그럴 땐 몇 번이고 찾아가서 저희 취지를 설명드려요. 그러면 대부분은 수용 해주시더라고요. 봉사 아이템 관련해서도, 저희가 단순히 봉사 차원만이 아니라, ‘문화 교류’라 는 또 다른 의도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음식 봉사를 할 때도 한국 음식이 아니라 중국 음식을 준비할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물만두나 철판만두를 포함한 중국 만두, 중국식 오리탕, 중국인이 먹는 옥수수 빵, 중국 냉면 이런 메뉴들로 식사 대접을 해드리는 거예요. 처 음엔 거부감을 표현하시다가, 드셔 보시고는 “오, 맛있네” 하실 때 정말 큰 보 람을 느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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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희가 향신료 가능한 한 적게 쓰고 최대한 한국 어르신들 입맛 에 맞게끔 레시피를 변형해서 음식을 만들어요. 고기도 좋은 걸로 쓰 고, 만두피도 가능한 한 어르신들이 불편 없이 씹으실 수 있도록 얇게 만들고요. Q. 쉬운 일이 아니네요. 누군가를 돕는 일은 언제나 환영받을 줄 알았거 든요. 게다가 이런 일을 일주일마다 지속적으로 하고 계시다니, 놀랍 습니다. 사실 힘들죠. 독거노인 반찬 해드리는 것만 해도 제가 아침 8시에 나와 장 보고 주민센터 요리실 빌려서 음식 만들고, 포장해서 배달을 끝내면 시간이 저녁 8시가 돼요. 거의 온종일을 쉴 틈 없이 움직여야 가능한 일인 셈이죠.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05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Q. 이번엔 반대로 여쭤볼게요. 봉사를 하시면서 가장 즐거운 일은 어떤 거예요? 공연이죠. 중국 소수민족 춤 공연할 때 제일 행복해요. 사실 어렸 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중국에서는 할 기회가 없었거든요. 저희끼리 배워서 서로에게 알려주고 안무를 짜고, 공연 전에 맹연습을 하고, 그 런 과정 자체가 너무 즐거워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저희가 2015년 무렵에는 정말 잘 나갔던 적도 있어요. 대구, 부산, 광양, 남해…. 진 짜 전국적으로 초청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02
058 정성껏 만든 음식을 지역 공유 냉장고에 넣으며

책임감, 열정 그리고 믿음

05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Q. 에너지가 넘치시고, ‘본 투 비 긍정’이라고 말씀드려야 될 정도로 매사에 긍정적이셔서, 질문을 드리기가 좀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이 모든 일을, 그것도 리더로서 해 나가시는 데에, 적지 않은 어려움 과 고뇌가 있으실 것 같아요. 되게 많죠.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재정이죠. 공적인 예산은 많다고 하지만 실제 이주민 당사자들에게 사용되는 예산은 여전히 너 무 적다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같은 당사자 중심의 단체는 공모 사업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선정되는 것 자체가 여전히 너무 어 려워요. 그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의식은 매우 취약하고요. 그러다보니, 우리 단체의 많은 일들을 결국 자부담으로 해야 하는데, 거기는 한계가 있잖아요. 필요한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은 쌓 여 있는데, 예산이 없는 게 현실이에요. 아이들이 운동회를 너무 좋 아하고, 지난 몇 년 코로나로 인해 모일 기회가 없어서, 올해 우리가 아이들 운동회를 열어주었는데요, 그것도 다 자비로 한 경우거든요. 또 다른 장애물은, 여전히 저희를 토론이나 참여의 주체가 아니라, 구색 맞추기용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점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도 어떤 지자체에서 ‘이주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02

보자’ 이런 취지의 회의가 있었는데요. 실제로 그런 프로세스가 추진되는 것

이 아니라, 이주민 당사자인 제가 그 모임에 참여한 것으로 마무리되는 분위 기더라고요. 그럴 때는 많이 아쉽지요.

Q. 그런 어려움 속에서 훌륭하게 해 오고 계시잖아요. 혹시 리더로서의 자격, 이런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열린 마음, 책임감, 책임지고 끝까지 해야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요.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단체의 이름처럼, 정(情)이고요. 모든 사람을 신뢰와 긍정, 호혜의 파트너로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 이게 정 이거든요. 저는 정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에 열정, 그리고 자기의 결정에 대 한 믿음, 이 셋이 리더에게는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Q. 그런 리더십이 흔들릴 정도로, 어려우셨던 적도, 당연히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럴 땐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무엇보다 저를 끝까지 믿어주는 동료들이죠. 제가 흔들릴 때마다 그들이 저를 다시 굳게 세워주곤 해요. 네가 있어서 우리 단체가 있는 거라고, 확신을 줄 때, 저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제 성향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포기라는 것을 잘 모르거든요. 자존심도 강하고, 어렵다거나 불가능하다거나 그러면 더욱 열정이 타오르는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그래 한 번 해보자!’ 이런 도전 정신, 그게 지금까지 저를 지탱해 온 원동력이 아닐까 싶어요.

060

일종의 자기 믿음 같은 건데요. 제 마음 속에 저 자신에 대한, 그리고 제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남들이 뭐라 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하 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가족에게도 보탬이 될 수 있다, 이런 믿음요. 그런 점에서 변화나 장애물을 두려워하는 대신 저는 늘 한 발 더 나아 가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정이

무엇이든 함께 하는 든든한 ‘정만천하’ 회원들과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061 2022 02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괜찮아, 잘했어

Q. 지금까지도 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혹시 앞으로 이건 조금 더 해보고 싶다, 그런 것 있으세요? 그냥 저희 단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죠. 단체를 좀 더 키우고 싶기도 하고요. 물론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여러 힘이 보태져야지 가능한 일이긴 해요. 우리 단체에서 늘 헌신 봉사하는 멤버들, 기본적인 인건비 정도는 만들어드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를 위해서 일단 내년엔 경기도민간단체, 비영리민간단체 등록을 좀 하려고 요. 우리 스스로의 공간도 확보하는 게 제일 중요한 현안 과제이고요. 그리고 이주 여성과 아이들인데요. 이주 여성들과 우리 아이들이 한국 사회 의 당당하고 동등하고 유용한 구성원이 다 되는 날까지, 그 환경을 만들어주 는 일을 하고 싶어요. Q. 정치계 진출도 계속 모색하고 계신 것으로 들었어요. 기본적으로 저는 이주민의 권리는 이주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 해요. 그러려면 관련 정책을 만들 수 있는 역할이 필수적인 것이고 저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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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 자신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이주민들과 그들의 아이들 을 위해서 제가 나섰던 거예요. 비록 실패했지만 친구들이 “너 대단 해, 너 진짜 잘했어, 대단한 용기였어”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물론 상처는 좀 오래 가더라고요.

저는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이주민 출신 정치인이 꼭 필요하다는 제 생 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요. 아이들이 크고 있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도 자신들을 대변할 대표가 필요하거든요.

정이 가득한 세상의, 왕, 그나예요

자녀들과 함께 체육대회를 마치고

06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02

Q. 20년은 중국인이셨고요. 스무 살 이후에는 한국인이신 거잖아요. 어려운 질문 인데요. 왕그나 님에게 중국과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 입장에서는 중국도 내 모국이고 한국은 현재의 제 고향이죠. 중국과 한 국, 한국과 중국, 둘 다 제 나라고, 고향이기도 해요. 두 나라 모두가 잘 되기 를 정말 바라죠. 저는 귀화를 했기 때문에 실제로도 한국 국민이거든요. 제 아 이들은 날 때부터 한국 국민이자 한국 사람이고요. 그래서 저는 중국이 더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한반도는 조금 더 평화로워졌 으면 좋겠고요. 두 나라 사이에 우호적인 교류가 있기를 바라요. 그치만 최종 적으로는 제가 한국에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위해서 최대한 무엇이든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Q.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한 마디 해주세요. 그런 거는 별로 없는데 그냥 그거예요. 한국 사회단체, 한국 사회 사람들 이 좋은 사람 되게 많아요.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또 가까이 찾아오고 다 같 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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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화합 이렇게 만들면 진짜 너나 나나 구분 없이 똑같이 한국 사람처럼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근데 아직도 그런 의식이 조금은 있는 중국과 한국, 한국과 중국, 둘
다 내 나라
06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것 같아요. 외국인 너희들 뭘 줘 이런 식으로. 진짜 아무 편견 없이 그 렇게 같이 살 수 있는데 만약에 그렇게 안 하면 서로가 힘들어요. 서로 의 문화를 모르면 진짜 그냥 싸움이 되고 서로 다 싫어하게 되니까요. 수원화성 문화제 공연 후 정이 가득한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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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그나예요
066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03 chapter 정다은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Q.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저는 캄보디아 껌뽕짬에서 온 정다은이라고 합니다. 캄보디아 이 름은 찬소포안이에요. 이름의 뜻은 없어요. 캄보디아에서 이름은 그 냥 이름일 뿐이어서 별다른 뜻이 없거든요. 껌뽕짬은 프놈펜에서 차로 2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제 고향이에요. 한국에는 2005년 남편과 결혼하면서 오게 되었어요. 저는 내향적이지만

사람들과 함께 채워나가는 시간들을 좋아해요. 같이 있는 사람이랑 대화하고 즐겁게 해주고 그런 걸 좋아해요. 처음 본 사람에게도 낯가림 같은 것은 없어요. 금방 친해져요. 어렸을 때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해봐서 인지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랑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저는 중3짜리 딸 엄마이기도 해요. 공부하는 것, 가르치는 것, 먹는 것, 영화 보는 것, 수영하는 것, 산이나 바다에 가는 것,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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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인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03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캄보디아 공동체 리더 역할

다른 하나는 한국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라는 비영리민간 단체에서 이주노동자 상담 및 통역 지원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부천이주노동 복지센터, 아시안허브,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 등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었습 니다. 문화 교육이나 노무 교육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제가 하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제 자신이 다양한 교육을 받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어능력 4급, 사회통합 5단계를 이수했고요. 글 로컬생활문화예술리더, 글로컬오피니언리더, 다국어 통번역지원단, 가정폭 력관련시설 종사자양성교육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2014년에는 부천의 자랑 스런 100인으로 선정되어 부천시장상을 탄 적이 있습니다. 캄보디아 대사님이 한국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를 방문하신 날, 동료들과 함께

06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Q. 다양한 일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주로 어떤 일들을
오셨는지요? 제가 하는 일은
을 하는 것이고요.

얌전하고 귀엽다고요? 글쎄요...

Q. 대단하시네요. 캄보디아 계실 때는 어떠셨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비영리민간단체에서 일을 하셨었나요?

캄보디아에서는 일반 회사에서 일을 했어요. 행정과 회계 분야에서요. 중 국 회사에서도 일을 했고, 한국 회사에서도 일을 했어요. 한국 회사에서 회사 동료였던 남편을 만난 거고요. 제가 자랄 때 집안 형편은 좋은 편이 못 되었어요. 제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 빠가 헤어지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동생과 헤어져서 할머니 댁에서 어린 시 절을 보냈어요. 그래서인지 어려서는 말이 없고 얌전한 아이였어요. 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 뀌었지만요. 귀엽다는 말도 가끔 들었던 것 같고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걸 혼 자서 스스로 해야만 했어요. 학교가 할머니 집에서 자전거로 거의 두 시간 거리여서 고등학교 때부터는 학교 근처에서 방을 얻어 따로 지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대학을 바로 가진 못했어요. 일단 일을 해서 학비를 마련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회 사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야간대학을 다녔어요. 집에 돌아 오면 밤 열 시예요. 매일매일 좀 힘들었지만, 피곤한 줄 모르고 시간이 잘 갔 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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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공부도 해야 하니까 쉽진 않았지만 재미있었죠. 그렇게 입 학한 지 거의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어요. Q. 남편이 회사 동료셨던 거네요. 그럼 일종의 ‘사내 연애’를 하신 셈이에요. 맞아요. 남편은 캄보디아에 출장 온 상태였어요. 처음엔 남편이 외 국 사람이라 고민 많이 했었어요.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내가 가면 잘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통하는데 잘살 수 있을까? 걱정 많이 했죠. 남 편도 캄보디아 말을 모를 때라 그때는 영어로 소통했어요. 만난 지 3 개월쯤 되었을 때 사귀기 시작해서, 1년쯤 후에 결혼하게 되었어요.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캄보디아로 휴가갔을 때 조카들과 함께 절에서

07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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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의 나라 한국, 콜!

Q. 한국 사람 만난다니까, 가족들 반응이 어떠셨어요?

처음에는 가족들이 많이 반대했어요. 그때 그런 소문도 있었거든요. 다 른 나라 사람하고 결혼 잘못하면 팔려갈 수도 있다, 뭐 이런 소문요. 그러니 까 엄마가 엄청 걱정하고 정말 괜찮은 거냐고, 결혼해도 안전한 거냐고, 계 속 물었어요.

다행히 그때 제 남동생도 남편이랑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남 동생이 남편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설명해주었어요. 그 래서 허락을 받을 수 있었어요. Q. 그러면 결혼하신 후에 한국에는 남편과 함께 들어오신 거예요? 남편이 먼저 들어와서 결혼이며 제 입국 서류들을 준비했어요. 남편이 준 비가 다 되었을 때 그러니까 2005년 2월에 저는 한국에 입국했고요. 사실 한 국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선망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캄 보디아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대유행이었는데, 저도 많이 봤거든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송혜교씨가 나오는 ‘풀하우스’라는 드라마예요. 드라마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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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즐거운 일만
03 ‘한국 괜찮은 나라네,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진짜 제가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에 가서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지요. 고향에서 가족, 친지들과 저녁 식사하며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헐, 족발이 안 된다굽쇼

Q. 그렇게 걱정 반 그리고 약간의 기대를 안고 한국에 오신 셈인데요. 오셔서는 어떠셨어요? 처음 왔을 때는 시댁에서 3개월 정도 같이 살았어요. 한국 음식도 배우고,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한국 문화도 좀 배우고 그런 시간을 가 진 거고요. 3개월 후에 분가했어요.

Q. 캄보디아랑 한국 문화, 어떤 차이가 느껴지셨어요? 남편분이 그래도 캄보디아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셔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힘들었어요. 사실 아이가 7살이 될 때까지는 육아만 했어요. 시어 머니께서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하셔서요. 그런데 임신했을 때나 산후조리 방 법, 이런 게 너무 다르니까 힘들더라고요. 한국말이 안 되니까, 누구하고 의 논할 상대가 없다는 것도 힘들었고요. 임신했을 때부터 시어머니가 좀 간섭을 많이 하셨어요. 과일도 예쁜 과일 먹 어야 예쁜 아이 나온다면서 먹는 것도 통제하시고요. 병원에 가도 의사 선생 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더 스트레스가 쌓였어요. 아기 낳고 나서도 동영 상 보면서 목욕시키는 방법 등을 저 혼자 익혀야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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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 음식으로 한국에서는 미역국을 먹는데 캄보디아에서는 족 발을 먹어요. 임신 했을 때 여기서는 닭고기를 못 먹게 하는 것 같던 데, 캄보디아에서는 오리 고기를 못 먹게 하고요. 오리처럼 아기가 뒤 뚱뒤뚱 걷게 될 수 있다고요. 또 캄보디아는 모계 문화거든요. 어머니 중심의 문화예요. 그런데 한 국은 제가 결혼해서 왔을 때만 해도, 아버지 문화였고요. 그래서 제가 산후조리할 때도 시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모두들 그쪽엘 가셔서 저는 혼자서 2주 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어요. 아이들 양육이나 교육 방 식도 많이 달라요. 캄보디아에서는 그냥 애들을 자연 속에서 놀게 하 거든요. 한국처럼 도구나 기구를 사용해서 노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 까, 한국 아이들하고 같이 놀게 할 때 조금 힘든 게 있어요. 차별까지 는 아니더라도 조심스럽고, 또 우리 아이들 노는 방식을 한국 엄마들 이 싫어할 수도 있다는 그런 걱정이 들 때도 있고요. 딸 초등학교 졸업을 축하하며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07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03

빨리빨리?

나는 더 빨리빨리

Q. 그렇게 육아에 전념하시고, 한국 문화를 조금씩 알아 가시다가, 이제 본격적 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시게 되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사실 아이 갖기 전에 몇 개월 한국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일산에 서 부천으로 분가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시댁엘 갔었어요. 남편이 같이 못 갈 형편이면 제가 혼자서 전철 타고 다녀오곤 했었거든요. 전철에서 우연히 캄보디아 노동자를 만났는데 그분이 소개를 해주어서 부천 제조업 공 장에서 한 8개월 일을 했어요. 캄보디아에서는 중국이나 한국 같은 외국계 회사에서 행정이나 회계 등 관 리 업무를 하던 제가 한국 공장에서 처음으로 육체노동을 하려니까, 쉽지 않 았어요. 특히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캄보디아에는 그런 문화가 없거든요. 그런데 공장에서는 뭐든 빨리빨리 해야 하더라고요. 아이가 생기면서 회사는 바로 그만두었어요.

Q. 아이를 낳고 키우는 7, 8년은 댁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네요?

아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 한 1년 정도 캄보디아에 다녀온 적은 있어요. 저하고 아이만 갔다 왔어요. 친정 어머니께 아이 육아 지원도 받고, 제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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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마무리하고, 그리고 사업 같은 것도 알아볼 겸 겸사겸사 다녀 왔어요.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사업은 접었고요 짧은 시간이지만 낮 에는 제가 캄보디아 한국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고, 저녁에 학교 공부 하고, 그렇게 밤늦게야 귀가하는 생활이어서, 하루하루 바빴어요. 대 학 마무리하면서, 아이랑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요.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니까, 아이가 어린이집 적응하는 걸 힘들어 하더라고요. 1년 정도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캄보디아 말을 하다가, 다 시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하려니까,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부터 저도 다시 본격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Q. 아이를 낳고 키우시는 동안에도 단순히 전업주부 역할만 하신 것은 아 니셨네요. 공장도 다니시고, 또 캄보디아에도 다녀오시고 어떤 상황 에서도, 굉장히 역동적인 에너지를 발휘하시는 스타일 같으세요. 어 찌되었든 본격적인 사회 활동은 한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시게 된

시점, 2012년 무렵부터 시작된 것이네요.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07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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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 않아요, 괜찮다니까

2012년쯤에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3년간 직 원으로 일을 했어요. 커뮤니티 지원이나 통번역, 상담 일을 했어요. 다음에는 서울 아시안허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는 주로 통번역이나 문화 교육을 했 고요. 2016년부터는 한국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 취직해서 노동 상담과 교 육을 주로 하고 있고요. 2019년부터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에서도 파트타 임으로 상담 일을 하고 있어요.

Q. 대단하시네요. 결과적으로 일주일에 하루만 쉬시는 셈인데요, 안 힘드셨어요?

게다가 다양한 교육도 이수하셨고요?

괜찮았어요. 제가 정 피곤하다 싶으면 연차를 사용해서 휴식을 취하면 되 니까요. 여러 교육 프로그램들에 참여한 것은 배울 수 있는 기회여서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배우는 것에 욕구가 좀 있거든요. 제가 여전히 모르는 게 너 무 많아서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대부분의 강좌들이 퇴근 후에 진행되어서 조금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어요.

078

남편이

줄 수 있는 곳을 계속 찾 았어요. 그러다 발견을 한 거고요. 그렇게 처음에는 한국어 교실 수강 생으로 제가 센터에 드나들게 되었는데요. 그러다가 취업 권유를 받 아서 아예 직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 거죠. “엄마는 민간외교관” 다문화 열린토크쇼에 참여하며 (주최: 아시안허브)

07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즐거운
03
그곳하고는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Q. 이 엄청난 사회 활동의 시발점은 부천이주노동자복지센터 같은데요.
처음에 어떻게 연결이 된 거예요?
한국어 교육을 위해서
교육해

힘들다고?

사실 너무 행복해

Q. 현재 하시는 중요한 일이 아마 상담, 교육 그리고 캄보디아 커뮤니티 운영,

이 세가지가 아닐까 싶어요. 그 일들에 대해 조금씩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으

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런 일들이 너무너무 좋아요. 특히 캄보디아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정말 행복해요. 저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진짜 많이 힘들었으니까요. 일단 한국에 온 이주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의사소통이잖아요. 소통의 한계로 월급을 제 때에 못 받 는다든지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고요.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에 불 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아주 많아요. 상담과 통역을 통해 그런 오해 를 바로 잡아주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제 역할이에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 에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요즘에도 제가 전화하면 다짜고 짜 욕부터 하는 사업주들이 있거든요. 그냥 끊어버리기도 하고요. 요즘은 사업주 교육이 강화되어서 전에 비해서는 아주 좋아졌어요.

080
에서는 또 절박하니까 일과가 끝난 한밤중에도 계속 전화를 해
있어요. 그리고 제가 또 조금 이제 알려지다
다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노동자들 입장
오는 경우도
보니까, 상담 요청이 매일매일
몰리기도 하고요.

비롯한 문화 교육이고요. 또 하나는 요즘 하고 있 는 노동 교육이고요. 저는 캄보디아어랑 캄보디아 문화 가르칠 때 되게 재미있어요. 캄보디아가 어떤 나라인지, 캄보디아 국기는 어떻게 만들 어졌는지 그리고 킬링필드 같은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까지, 참여자들하 고 정직하게 제가 아는 것들을 공유하는 게 정말 좋거든요. 지금은 주로

중대재해 교육, 산업안전 교육 등 노동 안전 교육을 하고 있어요. 한 달 에 적어도 한두 번은 건설 현장 등에 직접 나가서 캄보디아 노동자들에

게 교육을 해드려요. 이런 교육은 준비가 훨씬 철저해야 해요. 현장에서

사용하는 어휘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가는 게 매우 중요하거든요. 예

를 들어서 건설 현장 안전 교육 같은 경우 ‘발판’ 이런 용어가 캄보디아어

로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 그런 걸 사전에 다 준비해가야 해요. 중대재 해법 같이 시행한 지 얼마 안 된 경우는 더 많은 공부와 준비가 필요해요. 중대재해 교육을 하면서

08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03 Q. 특히 교육 프로그램 진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이유가 있나요? 네. 제가 했거나 지금 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은 크게 두 종류예요. 하나는 캄보디아어를
082 Q. 캄보디아 가정 자녀들을 위한 언어 교육 같은 것도 진행을 하시나요? 캄보디아 공동체 차원에서 ‘엄마 나라 말 배우기’ 이런 걸 시도는 해봤는 데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제 딸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아이들 은 한국어가 더 편하고, 갑자기 캄보디아어를 하려면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 서 그런 것 같아요. 캄보디아 공동체에서 자녀들과 엄마 나라 음식 파티를 하며

놀러오세요, 그냥

Q. 이제 공동체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일단 어떤 곳인지 소개를 좀 해주세요. 한국에서 생활하는 캄보디아 사람들 자조모임이라고 보시면 돼 요. 뭐 그렇게 거창할 것 없고요. 저는 공동체란 어린 아이들이 그네를 타거나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즐기는 공간이 라고 생각해요. 놀러가듯이 말이에요. 초기에 그리고 코로나 전에는 아주 자주 모여서 재밌게 놀았어요. 2주 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모였으니까요. 모여서 음식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고, 사는 이야기도 하고, 고민도 공유하고, 육아 상담도 같이 하고, 해결책도 같이 찾고, 여행도 가고 뭐, 그런 일을 하 는 거죠. 전주, 남이섬 이런 데 여행 갔을 때 정말 재미있었어요. Q. 공동체 활동을 하게 되고, 또 리더가 되신 계기 같은 게 있을까요?

처음엔 저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제 역할이 연락 하고 사람 모으고 이런 거다 보니까 그런 일을 하다가 고향 사람들 만 나게 되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음식을 같이 해먹고, 여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08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03

행도 함께 가고, 이런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무엇보다도 캄보디아어로 자유롭 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공동체에 참여 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리더가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리더를 추천하는데 다들 저 를 선택했더라고요. 아마 제가 당시 공동체를 지원하던 센터 상근자여서 저 를 추천들 했던 것 같아요.

Q. 요즘도 활발하게 공동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나요?

전에는 자주 모였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아요. 다들 아이들도 많이 컸 고, 또 한국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요. 또 거의 모든 회원들이 평소 일을 하니까요, 주말에 시간 내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 기운이 빠 지는 면도 있어요.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생각은 하지만요. 그렇게 회원들 참여가 전만 못하니까, 이제 행사 준비는 거의 제가 도맡아서 해야 되는 상황이에요. 그게 조금 스트레스이긴 해요. 코로나로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언제나 힘이 되는 공동체 친구들

084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질

Q. 그렇게 힘 빠지고, 지칠 땐 어떻게 하세요? 전에는 이렇게 힘든데, ‘내가 이 일 계속 이대로 해야 되나, 그만 둬야 하나’ 그런 생각했었어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힘든 것보다는, 제

가 좋아하는 게 더 커요. 제가 사람들 도와주는 것, 문제 해결해주는 것, 그런 걸 정말 좋아하니까요.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일을 제 가 하고 있다는 게 정말 뿌듯하고 행복하거든요. 그래서 힘들어도 더 열 심히 공부하고, 배워가며 이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제 일을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지인들이 계시거든요. 그분들도 제게 큰 힘 이 되시죠. 전에 같은 센터에서 근무했던 국장님이랑 가끔 만나 같이 차 도 마시고, 밥도 먹어요. 센터장님도 언제나 저를 가족처럼 챙겨주세요.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센터장님, 캄보디아 공동체 회원들과 원예수업 후

08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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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에서

이제 한국 사람

어떠세요?

Q. 귀화를 하셔서 이제는 공식적인 한국 국민이 되셨잖아요.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제 딸이요. 딸을 키울 때 조금 어려움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맞고 온 적 도 있고요. 제가 학교를 방문하면 선생님이 왠지 우리 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도 있고요. 뭐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 친구들도 다 딸을 좋아하는 편 이고요. 너무 다행인데 언젠가 딸아이가 “엄마 언제 이름 바꿔? 친구들이 자꾸 나한 테 뭐라고 해, 엄마 외국 사람이라고, 빨리 바꾸었으면 좋겠어” 이러더라고 요. 그래서 결정했어요.

Q. 이제 캄보디아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 같은 것 은 없으세요?

몇 년 전만 해도 딸아이 이야기 아니었다면, 굳이 귀화를 할 마음

없었어요.

086
솔직히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귀화가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한국 이 더 제가 살고 싶은 곳이에요. 한국에는 제가 할 일도 있고, 친구도 많고, 가족도 있고요. 캄보디아가 그리우면 이젠 언제든 다녀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국적을 바꾸었다고 해서 제 고유의 정체성이 변하는 것은 아 니니까요. 저는 이제 한국 사람이면서 캄보디아 사람, 캄보디아 사람 이면서 한국 사람이지요. 어렸을 때 저를 떠올리면 캄보디아가 배경이지만 지금 마음속에 제 삶의 배경은 한국이에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이대로 계속 행복 하면 좋겠어요.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하다는, 웃는 얼굴이 예쁜 다은님

즐거운 일만 해요, 하는 일이 다 즐거워요, 찬소포안 아니 정다은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087 2022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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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088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04 chapter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Q.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파키스탄 구즈란 말락 출신의 사업가 알리 무다사르입니다. 2006 년에 한국에 왔고요. 현재는 김포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딸 하나, 아들 하나 있습니다.

Q. 한국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는지요?

영국 유학 중에, 형의 권유로 학업 대신 사업을 선택해서 한국에 오 게 되었습니다. 에이시엠이라는 무역회사 대표로 건설 장비, 자동차 등을 중동과 남미 등에 수출하는 일을 합니다. 2014년부터 3년 연속 무역의 날 수출의 탑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파키스탄 무역 협회 회장직도 맡고 있습니다. 경기글로벌센터를 비롯한 여러 비영리민간단체에서의 자원봉사 활 동도 제가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090
04
저는요, 한국의 수출왕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09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에이시엠의 시작이었던 알리엔터프라이즈 대표 시절

Q. 혹시 가족 관계를 소개해주실 수 있으세요?

파키스탄에서 우리 가족은 부모님하고 오형제였습니다. 형이 하나고 남 동생이 셋이고요. 우리 가족은 농사를 짓는 집안이었어요. 파키스탄 시골의 농부 집안이었지만 부모님은 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큰 꿈을 꾸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때는 방법을 잘 몰랐지만요. 한국의 제 가족은 2013년 결혼한 아내랑, 첫째 딸 그리고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한국에 유학 온 알제리 학생이었어요. 딸은 초등학교 일학년이고, 아 들은 어린이집 다니고 있습니다. 딸이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서 저도 자랑스 럽고 행복합니다. 아내는 제가 가족을 챙기기보다는 사회활동에 너무 집중한 다고 불만스러워 할 때도 있습니다.

092
파키스탄에서 아버지와 오형제가 함께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족이죠

방배동, 이태원, 강남, 나쁠 수가 있겠어요?

그치만 갑은 IC

Q. 2002년부터 형하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배경 같은 게 있을까요? 간단히 좀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네, 맞아요. 한국은 저희 형이 아주 오래 전에 이주노동자로 잠깐 살았던 곳이에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형은 한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고요. 한국산 포클레인을 파키스탄에 판매하는 사업이었어요. 저 는 형을 도와주러 와 있었던 거였고요. 그러다가 제가 형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고요. 그랬더니 형이 영국에 지인이 있으니 그러면 영국으로 가라고 해서, 제가 영국 유학을 하게 되었어요. 영국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고민을 했어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학문인지, 사업인지 생각을 많이 하다가 최종적으로 사업으로 결 정하게 되었어요.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바로 한국으로 온 건 아니었고요. 먼저 베트남에 갔어요. 당시 베트남의 사업 환경이 더 좋 았거든요. 베트남에서 유통되는 한국 건설 장비 단가가 한국에 비해 서 훨씬 쌌으니까요. 베트남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사업을 했어요. 그런데 마침 그때 형이, 형 대신 한국에서 형이 하던 사업체를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09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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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래서 2006년쯤 한국으로 되돌아오게 된 거예요. 사업 내용은 같은 것이어서 한국에 오자마자 회사를 만들고 무역업을 시작 했어요. Q. 한국의 첫 인상은 어떠셨어요?

저는 좋았어요. 한국 오기 전부터 사실 한국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저 는 한국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당시에도 한국 브랜드가 파키스탄에서 많이 퍼져 있었으니까요. 제가 처음 한국에서 머문 곳이 방배동 오피스텔이었어요. 근처에 강남도 있 고 이태원도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거기서 6개월 정도 사업하다가 인천으 로 이사했어요. 지금은 제가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인천이에요. 인천에서 가장 오 래 살기도 했고요. 인천에 가면 그냥 기분이 좋아요.

Q. 한국 사람들을 만났을 때 첫 느낌은 어땠어요?

밖에서 볼 때 한국은 엄청 발전한 나라잖아요. 그런데 제가 막상 와서 사 람들을 만나보았을 때는 그렇게 엄청난 발전을 이룰 정도로 능력 있고 똑똑 하다는 느낌은 좀 없었어요. 영어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학교에서 영어를 오랫동안 배우잖아요. 그런데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런데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 사람들이 진짜 열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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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온종일 열심히 일하고, 밤늦도록 술도 열심히 마셔요. 그렇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고요.

한국 사람들의 능력이고 매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제 한국 사람들은 제가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독립적이 고 평화 지향적이고요. 그런 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 해요. 그래서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고, 주변 국가들하고의 관계도 좋 게 유지할 수 있는 거고요. 포클레인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09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04
리더십 자료집
온 무역왕 알리
뭐든
그게

다 판다?

아니 잘 판다!

Q. 하고 계신 사업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하는 사업은 무역업이에요. 한국의 콘솔 기계, 포클레인, 중장비 부 품 이런 것을 구매해서 파키스탄을 포함한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이집트, 두 바이 같은 중동 지방 그리고 러시아 쪽에 수출하고 있어요. 중고 자동차는 남 미 쪽으로 수출하고 있고요. 유압 엔진오일 같은 경우는 제가 직접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부산 공장에서 직접 제작해서 수출하고 있어요.

Q. 외국인 사업가로서, 무역의 날 3년 연속 대통령상도 수상하시고, 진짜 성공

적인 커리어를 만드신 거잖아요. 사업가로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한국 시장을 잘 파악하고 이용한 게 첫 번째라고 생각해요. 한국이 이렇게 세계적인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이 무역업이거든요. 그렇기 때 문에 한국에는 무역업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다 만들어져 있어요. 조금만 분석하고 노력하면, 무역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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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사업가로서 한 국을 너무 좋아해요. 두 번째는 신뢰인 것 같아요. 사업 파트너들과 동업자를 넘어서 인간 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거예요. 그런 분들 덕분에 제가 한국에서 안정적인 사업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하고는 이제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어요. 파키스탄도 같이 왕래하는 사이죠. 2014년, 2015년, 2016년 무역의 날에 수출의 탑을 수상하며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04
097 2022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그게, 된다고? 돈도 벌고 봉사도 하고, 가능해

Q.

사업가로서의 본업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몇 가지만 소개 부탁드릴게요. 제가 사업 이외에 하는 일은 크게 서너 가지 종류인 것 같아요. 우선은 사 업 관련한 모임이에요. 파키스탄무역협회(PBA)나 국제사업가연맹(GBA) 같

은 모임이에요. 그리고 공공기관에 민간 위원으로 참여하는 일도 있어요. 법 무부, 외교부, 경찰청 등에 참여해요. 또 하나는 비영리민간단체에서 자원봉

사하는 것도 제겐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파키스탄 커뮤니티 모임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Q. 그 일들을 다 해내시려면, 진짜 바쁘실 것 같아요. 집에서 불평하신다는 말씀도 이해가 되는데요. 사업 관련 모임에 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파키스탄무역협회 일은 제가 한국에 왔을 때부터 아주 열심히 했어요. 2015년부터 2021년까지는 회장직을 맡았었고요. 이곳은 단순히 무역인들 만의 모임은 아니고요. 한국에서 생활하고 계신 1만 4천 명의 파키스탄 분들 전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보셔도 될 것 같아요. 대사관과도 긴밀하게 협력하고요. 독립 기념일 행사 같은 것도 같이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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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

고 싶었어요. 그 모임이 모체가 되어 국제사업가연맹(GBA)이 만들어졌어요. 현재 저는 부회장이고요. 거기에는 66개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이 회원으

로 참여하고 있어요.

그 밖에 출입국관리사무소 커뮤니티, 경찰서 커뮤니티 등에서도 저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어요. 지난 코로나 때는 대구시에 방역 물품 을 기부했는데요, 그래서 정부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어요. 현재 저는 외교부의 이주민 대책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외국인 정책 자문 기구라고 보시면 돼요. 75주년 파키스탄 독립기념일에 전통의상을 입고서

09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04 정규적인
활동을
국에
모임은 서울뿐 아니라 대구, 부산 등 전국에서 열려요. 저희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를 했는데요. 저는 한국 사회에 대한민
도움을 주는 파키스탄 사람들도

리더십?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Q.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시면 보람도 크겠지만, 여러 단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시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파키스탄무역협회의 경우 회원이 350명인데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으시죠. 그런데 감사하게도 제가 회장직을 맡았던 10년간 어떤 분 도 저를 반대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저는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깨끗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러니까 욕심 안 부리고, 정직하고, 열정적으로 일에 임해야 한다고요. 그리 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어떤 일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고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싶어 하고, 또 도와주려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계셔서 리더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Q.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한다고 해도 모두가 만족은 안 할 것 같거든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당연히 모두가 다 제가 일하는 방식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언제나 실수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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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04 거고요. 저는 그럴 때 균형 있게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하나 잘못한 건 잘못이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걸 다 못했다고 부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나를 잃었다고 모두를 포기하는 선택을 저는 하 지 않아요. 파키스탄의 날에 연설하는 알리 님

정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 음식 마니아

Q. 좀 예민하거나 결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어요. 혹시 한국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불편하셨다거나, 차별을 받으셨다거나 그런 경험도 있으세요?

제가 한국 사람들이 볼 때는 좀 색다른 외모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많

이 쳐다보더라고요. 근데 저는 어릴 때부터 남들 시선을 즐기는 타입이었어

요. “와 멋있다, 키도 모델처럼 크고 잘 생겼다” 이런 주위의 평가를 긍정적

으로 즐기는 스타일이어서 한국 처음 왔을 때 주변의 시선도 그냥 쿨하게 넘 어갈 수 있었어요.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외국인하고 같이 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사 람들을 피부색이나 경제력, 사는 지역 등에 따라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분위 기는 있는 것 같아요. 제 경험으로 보자면 제가 송도에 살 때, 거기는 워낙 엘리트 외국인들이 많이 사니까요, 외국인 차별이라는 건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김포로 이사 를 가니까 상황이 달라지더라고요. 거기서는 외국인은 다 노동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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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해요. 미용실에서조차 ‘외국인은 안 돼요.’ 그렇게 쓰여 있어서 제가 깜짝 놀 랐던 적이 있어요. 가전제품 매장 같은 곳에서도 피부색이 어두운 고객들이 들어오면 매장 직

원이 판매할 생각을 안 하고 오히려 경계를 하죠. 송도나 강남 같은 지 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오히려 외국인이어도 상관없다, 나아가서 우리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발전에 보탬이 되어주니까 좋다, 이렇게 평가를 하잖아요. 피부색에 따라서도 대우가 굉장히 달라지지요. 피부가 흰 사람이 물 어보면 길도 알려주고 주소지까지도 동행해 주지만, 좀 피부가 어두 운 사람이 물어보면 무시하고 그냥 가버린다든지요. 아마 앞으로는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Q. 쿨하게 받아들이시고, 앞으로 좋아질 거라고 낙관적인 전망도 해주셔서, 다행이다 싶네요. 그 밖에 문화적 차이로 인한 에피소드 뭐 이런 것은 없으셨나요?

일단 기본적인 질서나 규범이 다르잖아요. 초기에는 그런 게 조금 어려웠어요. 쓰레기나 음식물 분리수거 이런 것도 대표적이에요. 음 식 같은 경우는 이제 완전히 적응해서 저는 집에서도 한국 음식 해먹 는 정도예요. 외국 사람들이 맵다고 그리고 냄새 난다고 한국 음식 피한다고 하는 데 저는 너무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탕 종류예 요. 동태탕, 생태탕 이런 것 너무 좋아하고 생선구이도 정말 좋아해요. 장어도 너무 좋고요. 비빔밥이나 된장찌개 거의 매일 먹어요. 제 딸들이랑 아내도 한국 음 식 너무 좋아해요. 특히 순두부찌개 같은 걸 좋아해요.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10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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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어 배울 때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사업할 때 사용하는 한국어는 저는 2~3개월 만에 다 익혔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읽고 쓰는 것은 아마 전 세계 언어 중에서 한국어가 제일 쉬워요. 한국 어는 알파벳이 딱 정해져 있는데 가짓수도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발음은 익히는 데 좀 시간이 걸렸고요. 제일 어려웠던 것은 존댓말과 반말 구분하는 거였어요. 처음엔 제가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왔잖 아요. 거래처에서 제게 반말을 쓰니까, 그걸 이해하는 게 힘들었어요.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된 건 2011년에 사회통합 프로그램 할 때였 어요. 제2회 국제사업가연맹(GBA) 리더스 포럼에서 한국 음식을 먹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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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Q. 한국에 오신 지 15년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한국 사회에 좀 변화가 있 는 것 같나요? 많이 달라졌지요. 제가 영국에서 공부하다 한국에 다시 오려고 했

을 때, 같이 공부하는 영국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

도 한국 잘 모른다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K-팝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 되었잖아요.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한국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세계적인 유행이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유행에 민감한 한국 사회가

되면서 더욱 바빠진 것 같아요. 전에 없이 오픈 마인드가 된 것 같기 도 하고요. 반면에 전처럼 한국인들이 가족과 살지 않으려 한다든지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낳지 않으려 한다든지, 이런 변화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Q. 한국 사회의 매력, 이런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정말 많죠. 우선 화장실 들고 싶어요. 어딜 가도 안전하고 깨끗한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10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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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있어요. 심지어 산에 가도 있거든요. 그리고 길도 좋아요. 시골에도 도로가 잘 되어 있어요. 밤 늦게 혼자 다녀도 안전하고요. 세계에서 제일 안 전한 나라는 아마 한국일 거예요. 그리고 사업 환경도 좋아요. 외국인이라도 자기 이름만으로 사업을 할 수 있 거든요. 어느 나라 가면 지분 51%는 그 나라 사람이 꼭 참여를 해야만 사업이 가능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한국에는 그럴 위험이 없어요. 그리고 일자리도 많고 월급도 좋아요. 외국인 지원해주는 시민단체들도 많고요.

Q. 이번에는 반대로 여쭈어 볼게요. 한국 사회의 아쉬운 점, 이런 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한국은 아주 좋은 나라예요. 외국인들에게도 아주 매력적인 곳이고요. 한 국 정부가 한국 사회에 기여할 의욕과 실력이 있는 외국인들에게 조금만 더 유연해진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될 준비가 된 외국인들, 그러니까 언어, 음식, 문 화 이런 걸 다 익힌 외국인들도 체류 자격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아요. 유학생이 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을 한국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일을 담당하는 법무부 직원들이 조금 더 착해져야 해요. 가 보면 조금 무섭게 보이거든요. 외국인들의 한국 생활과 관련한 법률들이 그렇게 엄격하면, 저는 발전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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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04 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외국인들이 좀 더 자유롭게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한국의 실리콘 밸리도 충분히 가능 하다고 생각하고요. 파키스탄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초대 주파키스탄 한국 대사님과 악수하며

나는, 단 네 명밖에 없는

Q. 지금까지 한국 생활에 만족하세요?

네. 저는 한국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너무 좋아요. 너무 편하고요. 사업 하는 것, 봉사하는 것, 무역협회 등 사회 활동 하는 것, 또 기도하는 것 모두 가 정말 저를 기분 좋게 해줘요. 경기글로벌센터, 월드비전, 사랑의 열매를 비롯해서 여러 비영리민간단체 활동도 많이 하는데 그것도 다 좋아요. 정기적인 후원도 하고, 행사도 같이 하고, 거리 청소도 하고요. 제 꿈을 펼쳐가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같이 하 는 것, 이게 너무 좋아요. 그런 과정에서 외국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조금은 부정적인 인식이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생각도 저를 즐겁게 해주고요. 하나의 좋은 일은 또 다른 좋은 일을 만들어낸다고 저는 늘 생각하고 그렇게 일하고 있어요. Q. 모범 귀화자상도 수상하셨다고요. 네. 제가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상이에요. 2018년에 제가 법무부 장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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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04 으로부터 모범귀화자상을 받았거든요. 나라에서 주는 거예요. 1948 년부터 2018년까지 19만 2천 명가량의 외국인들이 대한민국 국민으 로 국적을 취득했다고 해요. 그중에서 단
기에 제가 뽑힌 거죠.
저를 추천해주셨거든요.
게 너무 감사하고
모범귀화자 기념패 수여식에서
네 사람만 선정된 거예요. 거
부천에서 늘 저를 지지해주시는 비영리단체 대 표님께서
진짜 영광스러운 거죠. 그걸 제가 받았다는
행복했어요.

스타트, 업!

Q. 앞으로 계획이나, 꿈꾸고 계신 일이나,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계속,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꾸준히 계속하 는 거예요. 저의 성공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는 걸 목표로 하는 그런 일이요. 제가 외국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한국에도 도움이 되 고, 외국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조금 구체적인 목표라면 젊은 학생들하고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에서 창업할 수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주 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들이 한국에서 배우고 익힌 언어와 학문, 기술을 활용 해, 한국에서 창업을 한다면 미국의 실리콘 밸리 같은 것이 한국에도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한국의 발전을 위한 더 좋은 아이디어들이 더 많 이 나올 수 있을 거고요. 제 꿈은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 제가 꾼 꿈은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는 거였거든요. 그것은 이미 이룬 셈 이어서 감사해요. 이제는 여기 나온 외국 사람들한테도 도와주고 한국 사람들 한테도 도움 되고 싶어요. 거창한 계획 같은 것은 없지만, 그냥 열심히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아! 하나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어요. 제가 올해 주한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임명하는 명예 투자 자문 위원이 되었어요. 새로운 역할 이 생겼으니 책임감을 갖고 파키스탄과 한국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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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

이젠 내 나라

Q. 알리 님에게 파키스탄과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파키스탄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여전히 제 우선순위는 파키스탄이에요. 두 번째는 당연히 한국이고요. 제가 처음에 파키스탄에서 한국 올 때는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가족 들이랑 헤어져야 하니까요. 근데 이제는 파키스탄에서 한국 올 때도 기분이 좋아요. ‘내 나라에 가고 있다’ 이런 마음이니까요. 한국은 이제 내 나라예요. 한국에 있으면 좋아요. 한국에 있다가 파키 스탄에 갈 때도 좋고요. 파키스탄에서 한국에 올 때도 좋아요. 언제 어 디서나 한국은 이제 내 나라예요.

동태탕 어때요? 파키스탄에서 온 무역왕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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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꽃이 되다, 05 chapter
최연화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네가

제일 예뻐 바위가 꽃이 되다, 최연화

Q.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 시안에서 온 이주 여성 취옌화입니다. 한 국 이름은 최연화라고 합니다. 중국 이름하고 한국 이름하고 발음은 같지만 뜻은 다릅니다. 중국에서는 암석 암자를 썼었거든요. 중국에 서는 여자 아이들에게도 암석 암자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거든요. 한국에 오니까 여자 아이는 암석 암자를 안 쓰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에 와서 개명을 했어요. 그래서 발음은 모두 ‘취옌화’지만, 중국에서는 ‘암화’, 한국에서는 ‘연화’, 이렇게 되었어요. 예쁠 연자를 쓰고요. 남편 이 제안해준 이름이에요. 남편 눈에는 제가 제일 예쁘다고요.

고향 중국 시안 성벽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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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심양

그리고 시안

Q. 한국에 오시기 전의 생활이 궁금해요. 중국의 고향은 어디세요? 한국에 오시기까지 어떻게 생활을 하셨나요?

저는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어요. 2남 1녀의 장녀였는데 부모님 사랑을 많 이 받고 컸던 것 같아요.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어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혼 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었어요. 아시다시피 심양은 동포분들이 많이 사시는 곳이에요. 어머니가 동포셨거든 요. 그런데 아버지는 한족이셨어요. 초등학교 때 꿈은 선생님이었고요. 초등 학교 6학년 때쯤 시안으로 이주를 하게 됐어요. 시안은 동포분들은 거의 안 계신 곳이에요. 그러다보니 같은 중국인데도 불 구하고, 제가 어려서 자랐던 심양하고는 정말 엄청난 문화 차이가 있었어요. 심양에서는 주식으로 쌀밥을 먹었는데, 시안의 주식은 밀가루더라고요.

Q. 같은 중국 안에서, 이주민으로서 쉽지 않은 문화 적응의 과정을 겪으셔야 했 던 것 같네요. 네. 밀가루 음식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아서 아버지께 저는 쌀밥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쌀밥이 먹고 싶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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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교사가 되어, 네가 좋아하는 심양으로 가서 거기에서 선생님 일을 하면 된 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에만 전념했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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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서

통역사로

Q. 아버님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교사가 되신 거예요? 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공부만 했던 것 같아요. 대학교를 가야만 했고 대학교를 가려면 결국 성적이 좋아야 하는 거니까요. 중국의 대 입제도는 전국구예요. 전국구 단위에서 사범대에 입학하려면 정말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 거였고요. 게다가 시안은 중국의 3대 교육 중 심지 중에 하나여서 경쟁률이 더욱 치열했었어요. 그 어려운 경쟁을 뚫고 사범대에 입학했을 때는 정말 너무 좋았죠. 그런데 기쁨도 잠시, 학교생활이 너무 군대식이었어요. 자유 시간은 거의 없었고요. 그리고 졸업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어요. 졸업을 하려 면 교사의 기초 능력 100가지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거든요. 다행히 저는 책을 좋아했고, 제가 다니던 대학 도서관은 정말 최상급이어서, 대학 생활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던 것 같아요. 그리 고 졸업을 위한 100가지 테스트 준비를 하면서요. 그때는 힘들었지 만, 그때 열심히 배웠던 100가지 기술들이 졸업 후에 제가 사회 활동 을 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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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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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되다, 최연화

Q.

그렇게 꿈꾸던, 그리고 그렇게 절실하게 노력해서 성취하신 교사가 되신 건데요. 통번역사로 진로 변경을 하신 것은 ... 네, 사범대를 졸업하면서 제가 꿈꾸던 중학교 교사가 되었어요. 너무나 행복했지요.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서, 통역이 필요하다고 하 는 거예요. 아버지가 말씀을 하셔서, 방학이고 해서, 경험 삼아 해보겠다고 했어요. 저는 잘 하진 못해도 어머니가 동포셔서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었고요, 일본 어도 조금 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통역을 하면 제가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고요. 그렇게 조금씩 통역 일을 하다 시안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 을 알게 되었어요. 그분들하고 교류를 하고, 그분들을 돕는 일을 자연스레 하 면서부터 통역인으로서 제 DNA가 활성화되었던 것 같아요. 한국의 발자취를 찾아 역사 기행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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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봄, 잊을 수 없는 향기

Q. 그래서 교사에서 통역가로 진로를 아예 바꾸게 되신 거예요? 학교 방학 기간이었는데요. 한국에 와서 한 일주일 정도 동반 통역 을 해주세요, 라는 제안이 온 거예요. 98년인가, 99년쯤에요. 수락했지 요. 아버지가 재직하신 회사가 한국과 일본이랑 합작한 중국 기업이었 어요. 한국에 와서 현장을 따라 다니면서 통역을 하는데 그렇게 재미있 더라고요. ‘내가 정말 중요한 존재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여기서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네’라는 생각이 제 자존감도 엄청 높게 만들어줬고요. 그 경험이 결정적으로 제가 통역이라는 것을 공부 하게 된 시발점인 것 같아요. 당시 저는 완벽하게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었는데요. 이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Q. 그러면 통역사로서 한국을 첫 방문하게 되신 셈이네요. 그때 한국의 첫 인상은 어떠셨어요?

아마 그때가 5월인가 그랬을 거예요. 공항에 딱 내렸는데 한국의 봄이 너무 예뻤어요. 그리고 김포 공항에서 구미까지 가는 도로변에 아카시아 나무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 향이 너무 좋은 거예요. 맑은 공 기, 향기로운 꽃 냄새가 너무 매혹적이었어요. 여전히 그게 잊혀지지 가 않아요. 중국은 아시다시피 공기랑 물이 정말 안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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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되다, 최연화

바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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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런 사랑

Q. 통역이 매개가 되어서 남편을 만나신 건가요?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우연이라고 할까요. 여행 경로가 겹쳤어 요. 저는 시안에서, 남편은 한국에서 베이징 여행을 간 거죠. 근데 코스가 거 의 비슷했어요. 스케줄도요. 남편은 단체 여행이었는데, 한국어 가이드가 코 스마다 설명을 해줘요. 저는 그때는 중국인이라고 자신을 생각했더래서, 내 가 외국인들에게 중국 역사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까 라는 호기심에 남편 팀 루트를 따라갔거든요. 저는 한국어를 그때만 해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 고요. 근데 남편 눈에 제가 띄었나 봐요. 먼저 와서 말을 걸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 베이징 여행을 같이 하게 된 셈이에요. Q. 그런데 ‘어쩌다’가 아니라 ‘영원히’가 되신 셈이잖아요. 처음에는 연락처 주고받고, 그냥 친구라고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시안에 왔어요. 3개월 동안 아무 일 없이 단지 제 부모님께 결혼 허락 을 받겠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때 대화도 많이 했어요. 감동도 좀 했고요. 그 러면서 만난 지 2년 3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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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란 시안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시안 여자는 절대로 외부로 시 집을 보내지 않는다. 그만큼 보수적인 지역이에요. 그래서 저도 외국 으로 시집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고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부모님이 결혼을 정말 반대하셨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결혼해서 중 국에서 살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었고요. 그래서 결혼 결정을 하 고 한국에 인사드리러 왔는데, 시어머니께서 일단 1년만 한국에서 살 아라, 그러시더라고요. 남편이 장손이거든요. 1년이 5년이 되고, 5년 이 10년이 되고, 10년이 이제 20년이 될 거라고는 그때는 정말 생각 을 할 수 없었어요. 결혼식, 시어머니가 선물해주신 한복을 입고

최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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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바위가 꽃이 되다,

Q. 그렇게 어찌 보면, 어쩌다 한국행을 택하신 셈인데요, 한국에 오신 후에는, 진짜 슈퍼우먼 저리 가라, 엄청난 일들을 하고 계시잖아요. 소개를 좀 부탁드릴게요. 네, 제가 조금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긴 해요. 제 활동의 중심은 ‘한국 다문화협의회’라고 할 수 있는데요. 2010년부터 꾸준히 해 오고 있어요. 그를 기반으로 ‘다문화맘모임’을 통해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정책 제안 및 봉사 활 동을 해 오고 있고요. 그리고 ‘CK여성위원회’, ‘안산시노사민정협의회’, ‘안산 시평생학습관 다문화학습관리사’ 등의 활동도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대학원에 입학해서 복지행정 분야 박사 과정을 밟고 있어요. 모 대 학에서는 겸임교수로 강의도 하고 있고요. 그런 활동들 덕분인지 수원보훈지 청장 표창,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내실 수 있는 원동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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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변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함께해 주시는 분들, 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동포로서 또 이주민으로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좋 열망과 동행

은 경험도 많이 했지만 문제점들도 알게 되었어요. 이주민들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라든지 동포들에 대한 문화적 차별 같은 것들이 대표적 이죠. 저는 그런 문제들을 변화시키려면 제가 먼저 나서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꾸준히 하다 보니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느

낄 수 있게 되었고요. 물론 저 혼자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제가 부 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주변에서 늘 같이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 서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활동의 기반은 안산인 거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 따라 서울과 부산 에 잠깐 살았었어요. 안산에서는 2004년부터 계속 생활하고 있습니 다. 안산은 저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는 안산 사람입니다.

CK여성위원회 안산지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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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바위가 꽃이 되다, 최연화

소통, 그리고 소통 다시 소통

Q. 어머니는 동포셨지만, 시안이라는 전형적인 중국 도시에서 자라셨잖아요. 그래서 한국에서의 적응이 오히려 더 힘드실 수 있었겠다, 이런 생각도 들어요. 겉으로만 보면 한국 문화에 익숙하실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니니까요. 어떠 셨어요? 네, 맞아요. 어머니가 동포셨지만 제가 아는 한국 문화라고는 김치 정도 가 전부였어요. 제가 시안에서 자랐는데, 거의 뭐 중국 문화로 성장을 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저는 동포지만 중국 문화 속에서 자라고 배운 탓에, 한국어는 외국어 같았어 요. 배워서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했지요. 가사노동도 중국은 남녀평등이거 든요. 집에 먼저 오는 사람이 하는 거고 시간 있는 사람이 하는 거거든요. 그 런데 한국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중국식이니까, 결혼 초기에도 남편에게 거리낌없이 ‘여보, 나 오 늘 늦으니까 당신이 빨래해’ 이렇게 말하곤 했었거든요. 그런데서 작은 충돌 은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또 한국은 장남 혹은 장손 문화라고 해야 하나요. 특히 큰 자식이 부모의 노후 를 책임져야 하는 그런 문화가 있잖아요. 중국에는 그런 게 없어요. 오히려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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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 자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게 관례거든요. 중국이라면 저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한국에서는 제가 온종일 일을 하고 들어 왔어도, 일단 시댁에 들어가면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거예요. 어른을 공경하라는 것은 좋은데 한 번도 안 해 본 일을 하려니까 그건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경험상, 심각한 문화적 충돌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일어 났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중국은 도난 방지를 위해서 시건 장치를 밖에서 작동하

게 해요.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는 열지를 못하는 방식이거든요. 그런 데 제가 결혼 초기 시댁에 있는데 시아버님이 외출하시면서 밖에서 문을 잠그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요. 저를 못 믿는다고 생각해서요. 저를 가두어 놓았다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은 그게 아니 더라고요. 내가 안에서 열면 그냥 열리는 거였잖아요. Q. 문화적 차이가 심각한 오해와 불신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신 것 같아요. 모든 활동에서 소통을 강조하시는 이유 를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는 건가요? 네. 서로의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저는 같은 인간, 같은 주민 으로서의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서는 소통이 필수적인 거고요.

바위가 꽃이 되다, 최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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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는 “밥 한 번 먹자” 이게 그냥 인사잖아요. 그런데 중국 에서는 “밥 먹자” 라는 말이 그냥 인사 차원이 아니라 진짜 밥을 먹자는 말이 에요. 바로 연락을 하고 시간 약속을 해야 해요. 그런 차이를 서로 모르게 되면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에게 “밥 한 번 먹어요!” 라고 해놓고 연락을 안 하면, 중국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왜 저렇게 신용이 없 어?’ 하고 오해하게 되거든요. 또 중국 남성들이 여름에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그냥 더우 니까, 감기도 귀찮으니까, 짧게 자르는 거예요. 그런 사정을 모르는 한국인들 은 짧은 머리를 한 중국 남성을 보면 ‘무섭다’고 거리를 두게 되죠. 폭력배들 의 ‘깍두기 헤어스타일’로 오해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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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에 오신 이후에도 교사이자 통역사라는 전문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커리어를 이어가셨다면 좀 더 편안한 삶을 사실 수도 있으셨겠단 생각 이 들어요. 그런데 이주민 지원 활동가로 다시 한 번 진로를 변경하신 어 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사실 한국 생활 초기에는 제가 가진 그 두 가지 전문역량을 사용 해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중국어 학원을 운영했고, 이따금씩 통역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중국분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어요. 지인이 교 통사고로 사망했으니 도와달라고요. 그분들이 한국말이 안 되니까 처 음엔 제가 통역사로서 장례 절차만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교통사고 사망 피해자인데, 보험금이 말도 안 되게 적게 책정 된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제가 ‘정말 똑같은 인 간이지만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너무 심한 차별 대우를 받는구나.’ 라 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어요. 당시

바위가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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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다, 최연화
돌아가신 중국분의 딸이 한국에 들어오셔서 제게 그러더라고 요. “한국은 참 나빠. 아빠가 아무리 일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해서 한국 에 왔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 인간인데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어. 똑같은 인간, 맞아?

나는 다시는 한국엔 안 올 거야” 저는 그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분의 보험금 문제 해결을 위해서 1년여 법정 다툼을 함께하는 과정에서 ‘이주민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누군가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 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고민을 계속하게 되었어요. Q. 결국 그 사건이 이주민 지원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네요?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봉사 개념으로 시작했는데, 활동량과 분 야가 늘어나면서 아예 제 자신이 활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죠. 활동의 방 향성에서는 변화가 좀 있었어요. 초기에는 저도 이주민들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었는데요. 활동을 하다 보니까 이주민 당사자들을 수동적인 수혜자로 보는 관점보다는 한국 사 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보는 관점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래서 활동의 방향을 좀 틀게 되었어요. 동포인식개선 강사양성과정 교육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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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모여, 교류하고 소통해보자고

Q. 그렇게 봉사 차원에서 시작하신 이주민 지원 활동이 체계화되면서 ‘다문화협의회’가 만들어지게 되는 건가요?

네, 맞아요. 그 사건을 통해 다양한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미 이주민 지원 활동을 하고 계신 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되 었고요. 그분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게 차츰 확장 되면서 협의회의 틀이 자연스레 만들어지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렇게 자발적인 모임이었는데, 공식적인 활동을 위해 단체 등록을 하게 된 것이고요.

Q. 협의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소개 부탁드릴게요. 다문화협의회는 2010년 출범해서 2012년 비영리민간단체 등록 을 했어요. 현재 회원은 3백 명 정도고요. 저는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저희가 주로 하는 일은 외국인 주민, 이주 여성 그리고 이주 배경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다양한 인식 개선 활동이에요. 교육과 교 류가 저희 단체 활동의 키워드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저희 활동의 기조는 이주민과 동포도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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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무와 권리를 공유할 수 있어야겠

죠. 봉사 활동이 초기 활동의 주가 된 이유가 그런 데 있어요. 이주민이 받기 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해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리고 싶었거든요.

Q.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모든 활동이 소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이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런 것이 있을까요?

이주 배경 청소년들과 핸드폰으로 단편 영화 만들기 프로그램을 했던 것 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이주 배경을 둘러싼 불신 과 오해, 편견과 차별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걸 좀 좁히고, 아이들이 서로 교 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고요. 그런 고민 끝에 나온 프로그램이 핸드폰을 가지고 단편 영화 만들기였어요. 단지 아이들이 함께 모여 시나리오 작성, 촬영, 편집 등을 배울 수 있는 공간 을 만들어 놓았을 뿐인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더라고요. 아이들은 즐겁게 어 울려 작품을 만들어냈어요. 우리가 우려했던 아이들 사이의 벽 같은 것은 쉽 게 허물어져 버렸고요. 아이들의 작품은 영화제에 출품되기까지 했어요. 모 든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했고요.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이주 배경 아이들도 우 리랑 똑같은데 굳이 왜 ‘다문화’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프로그램을 통해 저는 소통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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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바위가 꽃이 되다, 최연화 05 청소년들과 단편 영화 만들기 프로그램을 하며

아무도 못해, 너희가 주인공이야

Q. 특히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으신가요?

한번은 제 아이 학교에서 상담을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선생님께 제가 이 주민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제 아이 이름을 부르시면서 “***는 ‘다문화 자녀’ 같지 않아요” 그러시는데, 제가 거기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왜 저런 표현

을 쓰시지? 다문화 자녀 아이는 어떤 모습이어야 정상인 것이지?’ 그때 선생 님들조차도 이주 배경 아이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한국어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에 들어가는 이주 배경 아이들 이 그렇지 않아도 적응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잖아요. ‘선생님들조차도 그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계시다면 과연 그 아이들을 잘 돌봐주실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되었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아이들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를 좀 더 집중적으로 고 민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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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것들인가요?

제일 중요한 것은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동행자’라 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거죠. 그래야 스스로 노력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도 중요해요. 아이들은 성인 들과 달리 스스로 선택해서 이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물론 언어도 중요한데요, 저는 언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자존감 회복 이라고 봐요. 그러자면 아이들이 정말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하고요. 청소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제일 즐거운 연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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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주 배경 청소년들에게
어떤
저는

Q. 다문화협의회 이외에도 다문화학습관리사, CK여성위원회, 노사민정협의회, 단원공동체 라디오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이처럼 다양한 활동 을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랄까, 그런 것을 좀 듣고 싶어요. 제가 중국에서 항상 들어왔던 말인데요. ‘계획은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어요. 계획대로 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목 표도 비슷한 것 같아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지기 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목표는 추상적이에요. 우리는 다 같은 지구 인이다. 똑같은 인간으로서 평화롭게 살자. 서로를 인정하는 차별 없는 세상 을 만들어보자.

이렇게 많은 일을 하시다 보면, 보람도 크시겠지만 힘든 일도 많으실 것 같아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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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이 가장 어려우세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실제로는 재정이 가장 어려워요. 모든 일을 자비로만 할 순 없으니까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동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도 활 동의 걸림돌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재정의 어려움은 모든 비영리 활동가들의 공통적인 숙제일 것 같아요. 200% 우리는 다 같은 지구인

의 열정으로 메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함께하는 분들의 동행 과 조력이 반드시 필요하고요. 동포에 대한 편견에는 당당하게 맞서 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동포는 정체성이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중국에서는 완전한 중국 인이 아니고, 한국에서는 또 완전한 한국인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끼

어 있는 존재가 동포들이거든요. 그럴수록 저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 기기보다는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동포이 지만 당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니까요. 자라면서 저는 ‘배우는 일을 중단하지 말아라, 배움이 너에게 언제나 힘이 되어 줄 테니까 ... ’ 라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정말 많이 들었거 든요. 한국 생활을 하면서 부딪힌 문화 차이, 세계관의 차이 등 제가 경험한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배움이 아 닐까 싶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해요.

중학교에서 동포 이주 역사 알기 수업을 진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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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바위가 꽃이 되다, 최연화

말하기, 듣기, 관심 갖기

Q. 지금도 정말 많은 일들을 하고 계셔서, 무엇을 더 하고 싶으신지 여쭤보는 게 그렇긴 한데요. 앞으로 계획하신 일, 더 하고 싶으신 일, 뭐가 있을까요?

공동체 라디오에서 중국어 방송을 진행할 예정인데요. 그게 잘 됐으면 좋 겠어요. 저는 많은 이주민들이 사회 참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데 사실은 그게 아직 잘 안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매체를 통해서 그런 메시지 를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주민들 의 생각, 살아가는 모습, 이런 것을 한국 사회에 전달하는 거죠. 소통과 교류의 폭도 좀 더 넓히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동포나 중국 이주민들 만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포용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희 단체가 요즘은 행사나 봉사보다는 대안적인 정책을 제안하는 그 런 일에 조금 더 치중하고 있거든요. 저희 스스로는 작은 세미나라고 이야기 하고요. 그런 세미나를 통해 우리 목소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표출하고, 정책 담당자들에게 전달하는 일도 잘할 수 있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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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때와 지금, 이주민 정책은 많은 발전이 있 었어요. 반면에 여전히 변화가 없는 부분도 있다고 봐요. 이주민과 이 주민 밀집 지역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반감 같은 것들은 사실 그대로니까요. 그런 부분의 변화를 위해서는 좀 더 실효성 있는 정책 들이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주민들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선주민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하고요. 이주민들이 지역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존재들이 라는 사실이 좀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안산공동체미디어 단원FM에서 DJ로 활동하며

137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바위가 꽃이
05 Q. 마지막으로 이주민과 선주민이
되다, 최연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좀 더 유념해야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138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139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프로젝트 추진 개요 06 chapter

2022 지역사회 이주민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다음의 네 가지 단계로 진행 되었습니다. 리더 추천 및 선발, 현지 조사와 인터뷰(및 추가 인터뷰), 홍보 영 상 제작, 최종 자료집 집필을 하였습니다.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센터 홈페이지 및 SNS를 통해 정해진 양식에 따라 지 역사회 이주민 리더를 공모하였습니다. 접수된 추천인 모두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최종적으로 다섯 분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8월 31일 제4차 민관협력 정책네트워크 포럼을 안산시글로벌다문화센 터에서 개최하면서 공로패 수여식을 사전 행사로 진행했습니다. 이후, 구조 화된 질문지에 근거해서 추가로 심층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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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추진 개요 <이주민 리더 공모 및 인터뷰 개요> 일자 내용 경로/장소 7월 29일 공모발표 (공모기간: 2022년 6월 27일~2022년 7월 22일) 홈페이지 페이스북 각 기관 및 단체 이메일 7월 7일 알리 무다사르(추천인 경기글로벌센터) 메일 7월 8일 왕그나(추천인 수원시청) 메일 7월 16일 정다은(추천인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 메일

일자 내용 경로/장소

7월 18일

개인)

리 더 출신국(네팔, 중국, 캄보디아, 파키스탄)의 언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가족, 친지, 친구, 동료들이 함께 이주민 리더들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1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8월 31일 공로패 수여식 때부터 (사)안산공동체미디어에서 영상 제작 작업 을 하였습니다. 촬영, 편집 등 영상 제작 기간은 9월부터 12월까지 총 4개월 이 소요됐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자막을 한국어뿐 아니라 이주민
최연화 인터뷰 네팔도서관 7월 29일 선정자 및 선정제외자 개별 통지 이메일,
8월 31일 공로패 수여식 안산글로벌다문화센터 10월 31일 알리
㈜에이시엠
11월 4일 왕그나
11월
11월
11월
최연화(추천인
메일 7월 19일 메타 너레스 쿠마르(추천인 개인) 메일 7월 22일 알리 무다사르 인터뷰 ㈜에이시엠 사무실 왕그나 인터뷰 정만천하 사무실 7월 23일 정다은 인터뷰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 7월 24일 메타 너레스 쿠마르 인터뷰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전화 연락
무다사르 추가 인터뷰
사무실
추가 인터뷰 수원 코스팟 회의실
6일 최연화 추가 인터뷰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11일 정다은 추가 인터뷰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
13일 메타 너레스 쿠마르 추가 인터뷰 온라인(ZOOM)

진행 – 내레이션, 자막(한국어), 음악 등

종합편집 진행 – 5명 리더 종합편 추가 작업

142 <이주민 리더 영상 제작 개요> 연번 제작 내용 1 경기도 이주민 리더 첫 미팅(4명 시상식): 제4차 민관협력 정책네트워크 포럼 2 촬영 스케줄 조율 3 영상 기획 및 구성안 작성 4 촬영 장소 섭외 및 실제 촬영 진행 5 인터뷰 구성안 질문지 답변 정리 6 경기도 이주민 리더 두 번째
7 1차
8 2차
9 촬영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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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습니다. 다섯 분의 리더들에 대한 사전 및 심층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질문과 답변을 재구 성하였습니다. 추가로 각 절마다 이주민 리더들이 제공한 사진 자료를 내용 에 맞게 삽입하였습니다. 집필을 마친 후에 각 이주민 리더들의 검토를 거쳐 자료집을 완성하였습니다.
미팅(1명 시상식 - 알리 무다사르) : 연찬회
촬영 진행
촬영 진행
가편집 진행
종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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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종합편 시사 : 외국인주민 정책 심포지엄 13 종합편집 진행 – 자막(이주민 각 출신국 언어) 14 최종 시사 최종 자료집 집필은 영상 제작이 완료된 시점부터
143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펴낸이 오경석 엮은이 이정은 펴낸날 2022.12. 펴낸곳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15385)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로 26(초지동 667-2) 4층 26 Hwajeong-ro, Danwon-gu, Ansan-si, Gyeonggi-do, 15385 Korea 전화. 031_492_9347 전송. 031_492_9349 누리집. www.ghmr.or.kr 꾸미고 찍음 첫번째별디자인 카피라이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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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이 책의 독창적인 내용을 허가 없이 마음대로 전재하거나 복제할 수 없습니다. 2022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이주민 리더십 자료집 다양성이 기회가 되는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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