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아리셀 화재, ‘보통의’ 이주노동자 산재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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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댓글 0건 조회조회 567회 작성일 24-07-25 16:38본문
2024.7.25.시사IN
원문보기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526
아리셀 화재, ‘보통의’ 이주노동자 산재와 다르다
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로 희생된 이주노동자 중 미등록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 외국인 취업 허가를 위한 다양한 종류의 비자는 현장에서 덫으로 작용해 비극을 낳았다.

이주노동자에게 비자는 ‘계급’이다. 지난 6월24일 발생한 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로 사망한 23명 중 18명은 이주노동자였다. 이 가운데 중국 동포는 17명이었고, 11명이 재외동포(F-4)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비자는 ‘법적으로 어떤 지위를 갖는가’를 결정한다. 체류 기간부터 취업 가능 업종, 정부 지원 등을 결정하는 데다 산업재해가 발생해 회사에서 보상금을 책정할 때에도 ‘한국에 얼마나 체류할 수 있는가’에 따라 지급 규모가 달라진다. ‘비자에 따른’ 차별적인 보상이 공공연하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F-4 비자를 소유한 이주노동자는 속칭 ‘최상위 계급’ 이주노동자다. 이 비자를 받으면 주민등록번호 구실을 하는 국내거소신고 번호를 취득한다. 금융 거래, 부동산 거래 등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며, 내국인의 일자리 보호를 위한 단순노무 같은 일이 아니라면 취업에 별다른 제한도 받지 않는다. 3년 단위로 체류 기간을 연장해 무기한 체류도 가능하다. 사실상 한국 사람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법적 지위를 보장받는다.
이 지점에서 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주노동자 산업재해와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제껏 주로 고용허가제로 들어와 사업장 변경이 제한되는 비전문취업(E-9) 비자의 이주노동자 산업재해가 주목받았다. 사업주 횡포와 임금 체불 등으로 결국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돼 노동시장의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에서는 희생된 이주노동자 중 미등록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 F-4 비자가 아닌 이들도 영주권(F-5) 비자, 결혼이민(F-6) 비자, 동포에게만 발급하는 방문취업(H-2)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참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그나마 이주노동자 중에 법적 지위를 넓게 보장받는, 가장 많은 선택지를 가진 이들마저 불법 노동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이 ‘파견업체로 허가받지 않고’ ‘고용·산업재해 보험도 가입하지 않은’ 인력업체(메이셀)를 거쳐 유해화학물질을 다루면서도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공장(아리셀)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F-4 비자를 보유한 노동자들마저 피할 수 없는 ‘이주노동 시장의 취약성’은 여타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구조적 한계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취업 절차와 규정이 F-4 비자를 가진 이주노동자까지 불법취업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좀 더 단순하고 접근하기 쉬운 이주노동자 노동시장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아리셀에서 근무했던 이주노동자들의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7월2일 경기도 화성시청에서 열린 아리셀 참사 희생자 시민추모제. ⓒ시사IN 조남진
이주노동 시장의 특징 중 하나는 ‘분절성’이다. 정부는 외국인에게 취업 허가를 내어줄 때 업종이나 직종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비자를 발급한다. 중국 동포 노동자들 역시 비자에 따른 취업 업종 제한 때문에 고질적 문제를 겪고 있다.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은 “비자가 오히려 덫이 된 지 오래됐다”라고 말했다. 가장 단적인 예가 F-4 비자가 있는 노동자에게 단순노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F-4 비자는 외국 국적자라도 한국인 부모·조부모가 있으면 입출국 및 체류를 편리하게 해주고자 만들어졌다. 다만 직업·학력·경제 수준 등을 고려해 일정 조건을 갖춘 이들을 대상으로, 또 단순노무에 종사할 수 없다는 조건을 두고 발급됐다. 국내에 편입되는 재외 동포의 ‘질’을 관리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국내 노동시장에서 ‘저렴한’ 외국인 단순노무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정부는 F-4 비자를 그대로 둔 채 중국·고려인 동포 등을 대상으로 단순노무 취업 시장을 개방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H-2 비자다. 대신 H-2 비자는 단점이 있다. 국내에서 취업할 경우 사업주가 신고해야 취업을 인정받는 특례고용 허가 사업장에서만 일할 수 있다. 사업주가 근로개시 신청을 하지 않으면 ‘불법취업’이 되는 등 고용안정성이 떨어진다.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이 일자리를 구하는 중국 동포들도 이렇게 F-4 비자와 H-2 비자를 얻은 이들로 나뉘게 됐다. 경제활동 능력이나 일자리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비슷하지만 F-4 비자를 받은 중국 동포는 생계를 위해 이삿짐 운반, 택배, 건설업 같은 일용직 노동이나 도소매· 가사노동 같은 서비스업 등에서 일을 할 경우 모두 ‘불법’이 된다. 안정적인 체류 조건을 갖는 대신 진입장벽이 낮은 일자리에 대한 접근성이 막힌 셈이다.
국내 노동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이런 비자별 규제 장벽이 더 이상 실익이 없다는 진단은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다. 김정룡 소장은 말했다. “현실에서는 내국인 노동자들의 참여율이 낮은 단순노무, 제조, 돌봄시장 같은 ‘빈자리’를 F-4, H-2 비자의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인구 감소로 인해 산업현장 전 분야에 내국인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각종 노동시장으로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비자 구분은 변화된 시장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 채 ‘불법노동자’만 확대할 뿐이다. 이주노동자 100만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 시장에는 이런 혼란들이 그대로 있다.” 정부가 실질적으로 이들을 하위 노동시장 인력으로 활용하면서도 ‘단순노무 직종 금지’ 같은 이중적 잣대로 취업 규정을 운영함으로써, 불법취업 시장이 확대되는 현실을 방치한다는 것이다.
분절된 노동시장의 혼란이 지속될수록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업체 같은 ‘사적 알선’ 통로에 의존한다. 박선희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사무국장은 노동자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제조업체들의 불법파견 관행과, 취업 제한이라는 규정에 갇혀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이주노동자, 그리고 위험 사업장 안전문제가 만난 ‘무법지대’에서 아리셀 참사가 발생했다고 짚었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E-9 비자와 H-2 비자에 해당되는 단순노무직 노동자에 대해서만 ‘고용허가제’라는, ‘공공알선’ 제도를 통해 구인·구직자를 연결하는 방식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이웃 노동자’ 되려면
그러나 다른 비자를 가진 이주노동자에 대해선 “고용노동부가 손을 놓고 있는 수준”이다. 박선희 사무국장은 지역별 고용센터에 일자리 지원을 받으려 해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F-6까지만 해’ ‘우리는 E-9만 해’ 이런 식이다. 일자리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어디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지 몰라서, 지인이나 동네 직업소개소를 통해 알음알음 일자리를 구하게 되는 이주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업체에 자신의 일자리를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생계를 찾아 헤매는 이런 구조는 결국 부메랑처럼 다시 이주노동자의 안전과 생존을 위협한다. 박선희 사무국장은 말했다. “정부가 취약계층 이주노동자가 고용된 사업장 안전점검을 강화한다고 해보자. 과연 고용보험도 가입하지 않은, 불법파견 업체를 통해 인력을 충원한 아리셀 같은 사업장이 이런 안전점검 대상에 포함될까? 전수조사를 하지 않는 한 걸러내기 힘들다.” 결국 ‘불법’의 절대량을 줄여야만 합법적 시스템이 실효성 있게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주민센터 친구의 이제호 변호사는 “이주노동자들을 수단과 관리의 대상으로만 볼수록 법적 지위가 까다롭고 복잡해진다”라고 말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시장의 수요가 늘고, 이들을 대하는 사회문화적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이주노동자’가 ‘이웃 노동자’로서 공동체 내에 정주할 수 있도록 법적 지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영섭 이주노동자평등연대 집행위원은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비자 체계의 간소화다. 이민정책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전문가들조차, 외국인 체류 자격 편람을 봐도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 자체가 구인자(사업주)와 구직자(외국인)에게 ‘고용 리스크’가 된다.
다음으로는 고용노동부의 변화다. 지금은 체계에서 누락된 다양한 법적 지위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노동부가 관할하지 않아서 아무런 고용 정보가 없는 F-4, F-5, F-6 자격의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E-9 외의 E계열 취업비자 등도 노동부가 관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어디서 이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지 노동부가 파악하고 근로감독을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는 느는데, 시장에선 여전히 불법이 횡행한다. 화성 아리셀 화재 사고는 이주노동 시장의 ‘중개자’인 정부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