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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안] 하늘나라로 간 나의 첫 번째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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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댓글 0건 조회조회 1,818회 작성일 18-06-0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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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31. 에큐메니안 이기호 | dlflq80@naver.com
원문보기 :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65

하늘나라로 간 나의 첫 번째 이주노동자
인권, 사람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

나는 지난 2007년부터 의정부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 있다.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이제 40대의 중년으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정말이지 12년이라는 세월 앞에 많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줄기차게 센터 상담통역팀에 있어 왔다. 이주민, 특히 이주노동자 노동법률 상담을 한 것이다.

그간 수많은 사례를 접하였다. 그 중에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사례가 몇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20대 후반의 젊은이였던 내가 센터에 처음 와서 접하였던 충격적이고도 인상 깊었던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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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진료를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이기호 제공

내가 소개를 하려는 분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파르다씨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센터 개소식 준비로 한창 바쁜 2007년 7월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8층에서 떨어져 전신마비로 식물인간이 된 그는 욕창이 매우 심했고 잘 먹지 못해 몸이 몹시 말라 있었다. 파르다씨의 상태가 그러했기에 간병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파르다씨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고 아무래도 환자의 아내가 간병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였기에 파르다씨의 아내를 한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관련 절차를 진행하였다. 당시 의정부출입국관리사무소를 오가며 파르다씨의 아내가 입국할 수 있도록 어렵게 절차를 진행했었던 기억이 난다. 난생 처음으로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쓰는 등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한 노력 후 며칠이 지나 다행스럽게도 파르다씨의 아내 카밀라씨가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 처음 입국하였을 때 그녀는 남편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남편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파르다씨는 10년 넘게 한국에서 미등록체류를 하면서 일을 하였고 그 동안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남편과의 만남 후 카밀라씨는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남편을 살리고자 정말이지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활짝 웃던 미소가 아직도 내 마음에 여러 감정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카밀라씨는 남편 곁을 지키면서 가슴 아프지만 행복한 간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008년 초 의사는 파르다씨가 언제든지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계속되는 투병으로 혈압, 욕창, 호흡 등 건강상의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 간 밤잠도 못자며 고생했던 카밀라씨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럽도록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의 죽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정말 사실인지 모르겠다. 파르다씨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상태를 알았는지 내게 병원으로 와달라고 했다. 식물인간 상태인 그는 항상 누워있었기에 얼굴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고 팔을 조금 들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들기 어려운 팔을 겨우 들어가며 내 손을 잡고 싶어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렸다. 그는 내게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안다고 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자신의 딸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안타까움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저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파르다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잘 움직이기 어려운 손으로 내 손을 다시 꼭 잡던 그 날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나는 전력했다.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과 접촉하는 등 신속하게 공문도 쓰고 협조할 수 있는 기관에는 협조를 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며칠 후 딸들을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딸이 모두 3명이었는데 1명은 사정상 오지 못했고 딸 2명만 한국에 오게 되었다. 딸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파르다씨를 만나게 해주었을 때가 기억난다. 딸들이 파르다씨를 만났을 때 아직 상대를 잘 모르기에 의외로 담담했다. 그러나 파르다씨 주변 침상의 환자들이나 간병하는 사람들은 눈물 바다였다. 

딸들과 함께 해서 그런지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3개월 동안 힘들고 어렵지만 생명을 이어 갔다. 가족들도 조금은 여유 있게 간병을 하며 그들이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해 했다. 3개월이 지나 딸들이 돌아갔고 그의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지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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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과 진료를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이기호 제공

파르다씨가 돌아가셨던 그 날 저녁이 기억난다. 부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이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니 병원으로 와달라고 하였다. 그 날은 나도 울었다. 나의 첫 번째 내담자로서의 이주노동자가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 후 사망에 관련한 행정절차와 산재법상의 보상을 받는 문제를 놓고 최선을 다했던 생각이 난다. 카밀라씨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던 날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괜찮다’라는 말은 고맙다는 표현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도 카밀라씨에게 “카밀라씨, 괜찮아, 괜찮아.”로 화답하였다.

그렇게 출국한 후 몇 년 동안 그의 딸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딸들 중 한 명이 시집을 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면서 내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참 감사했다.

이주노동 현장에 있다 보면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가 상담을 의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차마 이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재해를 본 적도 여럿 있다. 얼마 전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는 ‘2017 경기도 외국인 산업재해자 실태 조사’ 결과를 밝혔다. 조사에 참여한 208명의 산재피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을 이용할 때 경험한 어려움은, 신청방법을 모름 65.5%, 통역의 부재로 인한 정보전달의 어려움 56.6%, 산재 입증의 어려움 54.4%, 짧은 치료 및 요양기간 44.4%, 사업주의 비협조 42.2%의 순이었다.

주목할 점은 산재피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 가운데 산재보상보험을 신청하지 않은 경우가 52.9%로 신청한 경우를 10% 정도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외국인노동자의 산재발생율이 공식적인 통계보다 훨씬 대규모로 발생하고 있음을 뜻하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일하다 다치고 일하다 병을 얻으면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권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임을 생각할 때 아직도 우리사회에서의 이주노동자 인권은 갈 길이 멀다. 누구나 자유롭고 누구나 평등한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우리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기호  dlflq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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