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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불법체류 이유로…의료 사각지대에 어린이 방치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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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댓글 0건 조회조회 1,369회 작성일 20-01-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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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한겨레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area/capital/922660.html

불법체류 이유로…의료 사각지대에 어린이 방치하는 나라
 

유엔아동권리협약 가입하고도
미등록 이주아동 건강권 방치
건강보험 제외 비싼 병원비 짐
제때 치료 못 받고 신음 일쑤

2010년부터 학교 입학은 가능
출생등록 불허 ‘투명인간’ 대우
필수예방접종도 다 받기 어려워
일부 봉사단체 관심에만 기댈 뿐

방글라데시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이 2013년 5월 오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장으로 나가며 한국에 홀로 남는 아빠(왼쪽 등 보이는 이)를 돌아보고 있다. 국적을 갖지 못한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최대 2만여명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실태 파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천공항/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방글라데시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미등록 이주아동이 2013년 5월 오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장으로 나가며 한국에 홀로 남는 아빠(왼쪽 등 보이는 이)를 돌아보고 있다. 국적을 갖지 못한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최대 2만여명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실태 파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천공항/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아이 엄마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제가 불법체류자예요. 붙잡히면 바로 추방되니….” 지난달 30일 경기도 부천의 한 이주민센터에서 만난 필리핀 출신의 에일린(가명·44)은 연신 주변을 살폈다.

 

‘코리안드림’을 안고 그가 홀로 한국에 온 것은 2007년이다. 충남 천안의 플라스틱 제조 공장 등에서 일하다 필리핀 남자와 결혼해 딸을 얻었다. 행복한 순간도 잠시, 체류 기간을 넘긴 남편은 단속에 걸려 2010년 필리핀으로 추방됐다. 한국에 남아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한 에일린도 체류 기간이 끝나면서 2013년부터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자)가 됐다.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한달에 120만원을 벌어 딸을 키웠다.

 

그 딸이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출생신고 등이 안 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딸은 엄마의 나라에 간 적이 없다. “아이가 학교에서 뮤지컬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한국) 친구들이 좋아. 여기서 살 거야’라고 이야기해요.”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딸이 차별 없이 공부하는 학교와 달리 학교 밖 세상은 추운 겨울만큼이나 그에게 힘겹다. 특히 아이가 아플 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밀려온다. 지난 추석 때다. ‘엄마, 머리가 아파’라며 보채는 딸을 등에 업고 근처 병원을 찾았던 그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픈 원인을 찾기 위한 각종 검사비 등을 포함해 병원비가 120만원가량 될 것이라는 병원 쪽 설명을 듣고서다. 불법체류자인 그와 딸은 의료보험(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다. 외국인으로 분류돼 건강보험 가입자보다 병원비가 배 이상 비싸다. 약국에서 사 온 약을 딸에게 먹인 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고 했다. “딸의 손을 잡고 신께 빌었어요. ‘우린 돈이 없어요. 딸이 아파서 울어요. 힘들어요. 내 딸을 도와주세요’라고.”

 

지난 6일 서울 독산동에서 만난 몽골 출신 자라(45)의 둘째 딸은 아토피를 앓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인 그의 딸 역시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아이가 밤새도록 몸이 가려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지만, “병원에 데려갈 엄두를 못 낸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한달 수입은 모텔 청소로 버는 100만원 남짓이 전부다. 병원에 한번 갈 때마다 내야 하는 10만원이 넘는 돈은 그에게 큰 부담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만난 콩고 출신의 한 여성은 “먹을 게 없을 때는 아이한테 (봉지)녹차를 먹였다”며 울먹였다. 그는 “아이가 아플 때 의지할 곳은 신밖에 없다. 아프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미등록 이주아동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은 현행법상 이 제도가 출생 등록이 된 대한민국 국민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난 7월부터 정부가 등록 외국인에게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하고 난민 일부에게도 의료급여를 지원하고 있지만, 불법체류자와 미등록 이주아동은 지원 대상이 아니다.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병원비는 일반수가 적용을 받는 내국인과 달리 국제의료수가가 적용돼 배 이상 비싸다. 에일린과 자라의 딸은 한국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출생 기록도 출입국 기록도 없다. ‘투명 인간’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이가 아플까봐 이들 어머니는 늘 걱정이다.

 

‘국적과 관계없이 모든 아동을 출생 즉시 등록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30년째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1990년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지만 관련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정부는 2005년부터 미등록 이주아동의 영유아 필수접종을 의무화하고, 최소한의 응급 의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받을 수 있는 의료 지원은 단 두차례뿐이고 관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력병원도 전국적으로 100여곳에 불과한 상황이다. 이경숙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팀장은 “경기도 29개 보건소를 조사했더니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필수예방접종을 해줄 수 있다는 곳은 10곳뿐이었고 나머지 19곳은 못 해준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기준, 불법체류 외국인은 38만여명으로 2011년 17만명에 견줘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미등록 이주아동은 최대 2만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거주 사실만으로 학교 입학의 길은 터놓았지만 건강권 보호의 첫걸음인 불법체류자의 아이들에 대한 출생 등록은 허용하지 않아, 수많은 미등록 이주아동과 그의 엄마들이 이 땅에서 아파하고 있다.

 

그나마 ‘희년의료공제회’와 ‘한국이주민건강협회 희망의 친구들’ 등과 같은 국내 이주민센터와 이곳을 돕는 일부 뜻있는 의사와 시민, 기업이 불법체류자와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는 ‘한줄기 빛’이다. 이들 기관을 통해 불법체류자가 1명당 월 8천원 안팎의 보험료를 내면 긴급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사이 1만~2만여명의 불법체류자와 그의 자녀가 공제회를 통해 어려운 고비를 견디는 상황이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 희망의 친구들’의 김미선 상임이사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게 지금의 상황에 놓였다”며 “부모의 체류 신분을 이유로 어린이가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되게 둬선 안 된다. 이들이 자신의 기본권을 침해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는 하루빨리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